과학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과학기술혁신에 ‘안보화(Securitization)‘가 핵심 테마로 등장했다. 이는 실험실이 지정학의 최전선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2026년, 모든 연구는 ‘안보’라는 필터를 통과해야 하며, 혁신의 자유는 국가 이익이라는 통제 아래 재편되고 있다. 순수 과학기술의 위기 속에서 안보 과학기술의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
낭만적 과학의 부고
2026년, 전 세계 대학 연구실의 풍경은 공항 보안 검색대와 비슷해졌다. 연구자들은 논문을 쓰기 전에 파트너의 국적을 검증해야 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면 상업화 가능성보다 군사적 전용 가능성(Dual-use)을 먼저 신고해야 한다.
OECD가 발표한 <STI Outlook 2025>는 이러한 변화가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이고 비가역적인 ‘시스템 전환’임을 공식화했다. 과거 OECD가 “더 많은 개방, 더 많은 협력"을 통해 성장을 독려했다면, 이제는 “더 높은 담장, 더 좁은 문"을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라고 주문한다. 바야흐로 ‘순수한 과학’의 시대가 저물고, 국가 안보의 하위 수단으로 복무하는 ‘카키색 과학(Khaki Science)‘의 시대가 도래했다.
신뢰의 붕괴가 만든 장벽
이 변화의 기원은 명확하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반도체를 넘어 AI, 바이오, 양자(Quantum) 기술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서방 세계는 ‘개방된 연구 생태계’가 전략 경쟁국에 의해 악용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오픈 사이언스(Open Science)‘는 이상적이었으나, 현실의 지정학은 냉혹했다. 첨단 기술 유출, 연구자 포섭, 데이터 탈취가 잇따르자, 주요국 정부는 과학기술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수월성(Excellence)‘에서 ‘안보(Security)‘로 이동시켰다. OECD의 이번 보고서는 이러한 주요 회원국(미국, EU, 일본 등)의 합의된 ‘변심’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이중 용도(Dual-use) 범위의 무한 확장
OECD가 제시한 새로운 로드맵의 핵심은 ‘이중 용도(Dual-use) 기술의 재정의’다. 과거에는 미사일이나 핵과 관련된 기술만이 통제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민간 영역의 AI 알고리즘, 자율주행 센서, 유전자 가위 기술까지 잠재적 무기로 간주된다.
연구 안보(Research Security) 표준화: 연구 자금 지원 시 ‘지정학적 리스크 평가’가 의무화된다. “누구와 연구하는가"가 “무엇을 연구하는가"보다 중요해졌다.
수출 통제의 내재화: 기술이 완성된 후가 아니라, R&D 초기 단계부터 수출 통제(Deemed Export) 개념이 적용된다. 외국인 유학생의 특정 랩(Lab) 접근이 원천 차단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신뢰 기반 파트너십: OECD 회원국 간, 혹은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 간에만 데이터를 공유하는 ‘블록화된 연구 생태계’가 구축된다.
혁신 비용의 청구서
이러한 ‘안보화’는 공짜가 아니다. 세계 과학계는 막대한 ‘불신 비용(Cost of Mistrust)‘을 치르고 있다.
중복 투자의 비효율: 글로벌 분업이 붕괴되면서, 각국은 동일한 기술을 독자 개발하기 위해 예산을 낭비한다.
혁신 속도 저하: 데이터 공유가 막히면서 AI와 바이오 분야의 발전 속도가 구조적으로 둔화된다.
인재 유동성 경색: 전 세계를 돌며 최적의 연구 환경을 찾던 ‘두뇌 순환(Brain Circulation)‘이 멈추고, 자국 내에 머무는 현상이 고착화된다.
한국의 ‘안보 R&D 허브’ 전략
역설적이게도, 이 거대한 ‘STI의 안보화’ 흐름은 한국에게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준다. 한국은 세계적인 방위산업 경쟁력(K-Defense)과 첨단 과학기술 역량을 동시에 보유한 보기 드문 국가다.
[K-안보 과학기술 동맹 (The K-Security Science Alliance)]
한국은 단순히 무기(Hardware)를 파는 나라를 넘어, 무기를 구매한 신뢰 국가들과 함께 ‘안보 과학기술 연구의 중심(Hub)‘으로 도약할 수 있다.
수출 파트너십의 R&D 확장: 폴란드, UAE, 사우디아라비아, 동남아 등 한국 무기체계를 도입한 국가들은 이미 한국과 높은 수준의 안보 신뢰(Security Clearance)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신뢰를 기반으로 무기 체계 운영에 필요한 AI, 통신, 우주 기술을 공동 연구하는 플랫폼을 제안해야 한다.
이중 용도 기술의 테스트베드: OECD 기준을 충족하면서도, 미국보다는 유연한 한국의 R&D 환경을 활용해 신흥국의 ‘이중 용도 기술’ 공동 개발 수요를 흡수한다.
과학기술 주권의 연대: 미·중 어느 쪽에도 완전히 종속되기를 원치 않는 ‘중간 지대(Middle Power)’ 국가들에게 한국은 가장 매력적인 ‘안보 R&D 파트너’다. 방산 수출이 뚫어놓은 고속도로 위에 과학기술 협력이라는 파이프라인을 까는 전략이다.
생존을 위한 과학기술
2026년, 과학은 더 이상 진리 탐구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의 생존을 담보하는 방패이자, 동맹을 규정하는 신분증이 되었다.
OECD의 ‘안보화’ 선언은 과학자들에게는 비보(Sad News)일지 모르나, 전략가들에게는 명확한 시그널이다. 기술이 곧 안보인 시대, 한국은 ‘잘 싸우는 무기’를 만드는 나라에서 ‘안보를 위한 기술’을 함께 연구하는 나라로 진화해야 한다. 방산(Defense)이 과학(Science)을 견인하고, 과학이 다시 안보(Security)를 강화하는 선순환, 그것이 이 분열된 세계에서 한국이 나아갈 길이다.
[주목해야 할 것들]
미래 신호: 과학기술 NATO. 군사 동맹인 NATO처럼, 연구 개발 단계부터 기밀을 공유하고 공동 방어하는 ‘과학기술 안보 동맹’의 창설 가능성.
시스템 영향: 학술지의 분열. <Nature>나 <Science> 같은 저널이 서방 중심의 연구만 싣고, 중국과 러시아는 별도의 인용 생태계를 구축하여 지식의 갈라파고스화 심화.
전략 창: 안보 R&D 특구. 해외 우수 연구 인력을 유치하되, 철저한 보안 가이드라인 안에서 방산 및 이중 용도 기술을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한국형 다르파(K-DARPA) 클러스터’ 조성.
[전략가의 질문]
우리 연구소/기업의 파트너십 포트폴리오에 ‘잠재적 적성국’ 리스크는 없는가? (Supply Chain Due Diligence)
방산 수출 대상국과 논의할 수 있는 비군사(Non-weapon) R&D 아이템(통신, 소재, AI 등)은 무엇인가?
강화되는 OECD/서방의 연구 보안 규제를 ‘무역 장벽’이 아닌 ‘프리미엄 인증’ 수단으로 활용할 준비가 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