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100주년이 되는 2045년을 앞두고, 단기적인 진영 논리와 혐오를 극복하고 시민 주도의 장기적 국가 미래 비전을 수립하기 위해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각계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인구 구조 변화와 인공지능(AI) 기술 혁명 등 거대한 복합 위기가 도래한 가운데, 이들은 포용과 공존, 절제의 가치를 내걸고 과거 정부 주도의 하향식(Top-down) 방식을 넘어선 범국민적 ‘열린 공론장’을 제안했다.
3월 3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는 종교, 학계, 문화예술, 시민사회 등 각계 원로 152명이 뜻을 모은 ‘광복 100년 국민동행’ 제안 발표회가 열렸다. 국가 차원의 일관된 장기 미래전략 수립이 사실상 실종된 현 상황에 대한 깊은 위기의식 속에서 열린 이날 행사는, 대립과 반목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에 대한 기성세대의 뼈아픈 반성과 함께 집단지성으로 새로운 통합의 길을 개척하자는 결의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이날 행사를 주도한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명예이사장(‘광복 100년 국민동행’ 준비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광복 100년이 불과 20년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우리 사회가 극단적인 대립과 반목으로 얼룩져 있어 미래 세대 앞에 서기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 이면에 드리운 짙은 분열의 책임은 전적으로 기성세대에 있다”고 반성하며, “오늘을 기점으로 상대를 배척하는 언어를 거두고 ‘포용과 공존, 절제’의 가치를 다시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종교계의 성찰과 당부도 이어졌다. 영상으로 인사말을 전한 정순택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은 “사회적 갈등과 세대·계층 간의 거리감, 상호 불신이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공동체가 경쟁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서로를 이기려 하기보다 이해하는 마음과, 권리 주장에 앞서 함께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나아가 “이러한 복합적인 위기 속에서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포용과 공존, 절제의 가치가 절실하다”고 당부했다.
학계를 대표해 참석한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 역시 소통 부재의 현실을 우려했다. 오 전 총장은 상대의 주장을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지적하며, “이대로 방치할 경우 양극화가 심화할 뿐만 아니라 미래 또한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우려했다. 그는 “포용과 공존, 대화가 없다면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국민동행이 표방하는 핵심 가치를 실현하는 데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신낙균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불확실성과 함께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언급하며, 기성세대가 앞장서서 우리 사회와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목표와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자고 제안했다.
김영철 준비위원은 조갑제 대표, 류근일 전 주필 등 보수 언론계 원로들 역시 직접 이름을 올리지는 않았으나 이번 행사의 취지에 깊이 공감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는 이번 출범이 보수와 중도, 진보 언론인들이 이념을 넘어 뜻을 모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 외에도 제안자 명단에는 윤공희 대주교, 이해동 목사, 오대산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등 종교계 지도자들을 비롯해 강우일 주교, 김신일 전 교육부총리, 신낙균 전 문화관광부 장관, 황석영 작가, 김중배 전 한겨레 사장 등 사회 각층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뜻을 함께했다. (제안문과 제안자 152명 명단은 별첨 기사 참조)

이념과 세대를 넘어, 미래를 고민하는 토론 마당
‘광복 100년 국민동행’ 준비위원회는 제안문을 낭독하며 “대한민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강국으로 우뚝 섰지만, 그 눈부신 발전의 이면에는 대립과 반목, 갈등이라는 깊은 균열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저출산과 고령화는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으며, 밖으로는 기후·생태 위기와 인공지능(AI) 등 기술이 가져온 문명사적 전환, 그리고 새로운 패권 경쟁과 요동치는 국제질서라는 복합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현실에 책임을 통감한 기성세대와 각계 원로 인사들이 역사 앞에 나서기로 했다"고 제안 동기를 밝혔다.
나아가 “우리는 더 큰 목소리로 상대를 밀어내는 대신, 서로 다른 삶과 생각을 인정하는 ‘포용’과 함께 사는 ‘공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스스로 지키는 ‘절제’의 가치를 통해 우리 사회와 민족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며, “광복 100년 국민동행은 합리적 보수와 개혁적 중도, 성찰적이고 상식적인 진보가 유연하게 손을 맞잡고 대한민국과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고 논의하는 공론의 장이자, 이념과 세대를 넘어 국민 스스로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토론 마당이 될 것"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포용과 절제’ 비전 실현을 위한 이원화 조직 모델 제안
준비위원회는 자료집에서 ‘광복100년 국민동행’이 ‘포용과 절제로 여는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업 계획과 조직 청사진을 공개했다. 시민의 역동적인 참여와 정책 연구의 전문성을 동시에 꾀하는 ‘이원화 모델’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대립을 넘어서겠다는 목표다.
국민동행이 지향하는 조직 체계의 핵심은 공론과 연구의 이원화다. 우선 1단계로 고착화된 대립을 해소하고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사단법인 형태의 ‘범국민 참여 플랫폼’을 출범한다. 이는 지속 가능한 숙의와 연대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상설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된다. 나아가 2단계로는 공론화의 성과를 실제 정책으로 잇기 위해 재단법인 형태의 ‘미래 전략 싱크탱크(미래전략재단)’ 설립을 병행한다. 다가오는 시대적 전환기에 대응할 수 있는 중장기 국가 전략을 수립하는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연구 기구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갈등 넘어 미래로… 4대 핵심 사업 추진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국민동행은 크게 4가지의 핵심 실천 방향을 제시했다.
갈등을 넘는 열린 공론장: 소모적 정쟁을 넘어 이념과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론의 장을 열고, 숙의와 상호 존중의 대화 원칙을 세운다.
미래세대 리더십 육성: 기후 위기, 저출산, AI 기술 혁명 등 청년 세대가 마주한 미래 과제를 함께 고민하며, 청년들이 대안을 설계하고 리더십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다.
공존과 연대 캠페인: 혐오와 배제의 언어 대신 ‘포용’과 ‘절제’의 미덕이 우리 사회의 생활 규범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범국민적 문화 확산 운동을 전개한다.
미래 전략 수립 및 자산화: 평화, 인구, 기후 등 2045년까지 대한민국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를 발굴해 연구하며, 이 모든 과정을 100년의 지혜가 담긴 사회적 자산으로 보존한다.
국민동행은 다가오는 8월 15일 공식 창립대회까지의 우선적인 활동 로드맵도 함께 내놨다.
먼저 34월에는 비전 선포와 함께 성찰을 시작한다. 기성세대의 진솔한 사과를 담은 ‘백년의 사과, 백년의 감사’ 캠페인을 전개하고, 원로들이 갈등을 성찰하는 상징적 대화의 장인 ‘포용의 식탁’을 마련한다. 56월에는 포용의 대화를 종교·문화계로 확산하며, 연금·노동·기후 등 국가 난제를 주제로 한 숙의 토론 모델인 ‘상생 라운드테이블’을 시범 운영할 계획이다. 7~8월에는 기성세대의 성찰에 청년이 화답하고 해외 동포까지 아우르는 글로벌 연대 캠페인을 통해 범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한다. 이를 바탕으로 8월 15일 ‘2045 국민 참여 선언’을 발표하며 범국민 통합 기구로서 정식 창립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집단지성으로 돌파하는 국가 위기
상대를 향한 혐오와 배제가 난무하는 시대, 원로들의 뼈아픈 자성에서 출발한 ‘포용과 공존’의 메시지는 단기적인 진영 논리에 매몰된 우리 사회에 ‘장기적 관점의 통합과 새로운 미래 비전 수립’이 얼마나 절실한 과제인지를 일깨우고 있다.
돌이켜보면 지금껏 한국 사회의 국가 비전 설계는 주로 소수의 전문가나 관료 중심의 하향식(Top-down) 과제에 머물러 있었다. 그마저도 노무현 정부 시절의 시도 등 일부를 제외하면, 정권 교체기마다 연속성이 단절되며 국가 차원의 일관된 장기 미래전략 수립 체계는 사실상 실종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광복100년 국민동행’의 출범은 기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중요한 변곡점이다. 이는 국민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다가올 대한민국의 미래를 고민하는 상향식(Bottom-up) 미래예측이자 숙의의 마당이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공론장이 단순한 화해의 제스처를 넘어, 인구 구조 변화와 AI 기술 혁명 등 직면한 복합 위기를 돌파할 실천적이고 지속 가능한 국가 미래 전략을 성공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지 깊은 기대와 함께 그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