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영국 채텀하우스(Chatham House)가 발간한 보고서는 미국과 중국이 양분한 인공지능 패권 속에서 한국, 캐나다, 호주 등 중견국(Middle Powers)이 직면한 치명적인 종속의 위험을 경고한다. 흥미로운 점은 해결책이 ‘독자적인 100% 국산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글로벌 AI 생태계의 가장 큰 병목인 ‘컴퓨팅 연산력(Compute)‘의 한계를 인정한 중견국들은 이제 유사국들과 인프라를 합치는 ‘공유(Share)‘와 ‘헤징(Hedge)‘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다자간 기술 블록(Tech Alliance)을 구축하며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고 있다.

붕괴된 국산화의 환상과 새로운 나침반

미국의 압도적인 클라우드·빅테크 자본과 중국의 거대한 오픈소스 확산 전략 사이에서, 글로벌 중견국들의 국가안보회의(NSC) 테이블 위에는 짙은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한때 유행처럼 번지던 “우리만의 100% 자국산 거대 언어 모델(LLM)을 구축하자"는 식의 순진한 ‘국산화’ 슬로건은 천문학적인 GPU 확보 비용(Compute Bottleneck)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2026년 2월,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Chatham House)는 “중견국은 어떻게 미중 AI 지배에 대응할 수 있는가"라는 보고서를 통해 이 딜레마에 명확한 나침반을 제시했다. 보고서는 국가 영토 내에서 모든 AI 기술을 통제하려는 전통적 의미의 ‘소버린 AI(Sovereign AI)‘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진정한 21세기의 AI 주권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국가의 기술에 어떤 조건으로 의존할지 스스로 선택하고 공급자를 언제든 전환할 수 있는 협상력(전략적 유연성)‘을 갖추는 것으로 재정의되었다. 고래들의 틈바구니에서 돌고래들은 어떻게 거대한 그물망을 피하고 있는가.

8대 기반 요소와 컴퓨팅 권력의 비대칭

중견국들이 독자 노선을 전면 수정하게 된 배경에는 기술 패권의 지형이 극도로 비대칭적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채텀하우스는 AI 주권을 결정짓는 8대 기반 요소를 데이터, 컴퓨트, 첨단 모델, 에너지, 인프라, 산업, 인재, 신뢰로 규정했다. 이 중 중견국의 목을 조르는 가장 큰 병목은 단연 ‘컴퓨트(연산 자원)‘다.

미국 빅테크의 클라우드 종속을 피하려다 보면 비용 문제로 인해 역설적으로 중국이 주도하는 값싼 하드웨어와 오픈소스 생태계에 노출되는 덫에 빠지게 된다. 경제, 사회, 정치 체계 전반의 의사결정이 타국의 알고리즘에 의해 종속될 위기에 처하자, 단일 국가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컴퓨팅 인프라를 극복하기 위한 ‘초국가적 연대’의 필요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중견국의 4대 생존 경로: 연대와 헤징

채텀하우스는 중견국이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소버린 AI’ 전략을 4가지 경로로 도출했다.

전문화(Specialize): 글로벌 AI 공급망에서 대체 불가능한 특정 병목(예: HBM 메모리 반도체 등)을 틀어쥐어 레버리지를 확보하는 방식.

정렬(Align): 특정 초강대국 진영에 완전히 결속하여 의존성을 감수하는 대신 최우선 접근권과 안보 보호를 얻어내는 방식.

공유(Share): 유사한 입장의 중견국들과 기술 블록(Tech Alliance)을 형성해 데이터와 컴퓨팅 인프라를 공동 구축하고 집단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식.

**헤징(Hedge):**다양한 해외 공급망을 교차 활용하여 종속 리스크를 분산시키면서, 국내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코어 역량을 육성하는 방식.

여기서 가장 주목받는 파괴적 동학은 바로**‘공유(Share)‘와 ‘헤징(Hedge)‘의 결합**이다. 한국,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등 첨단 제조력과 자본, 양질의 공공 데이터를 갖춘 국가들이 개별적인 AI 자립을 포기하는 대신, 서로의 컴퓨팅 자원을 클러스터링하고 교차 접근을 허용하는 다자간 조약을 맺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않는 제3지대의 거대한 ‘기술 비동맹 블록’이 실체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술 종속에서 상호 의존의 다극화로

이러한 전략적 피벗(Pivot)은 글로벌 디지털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미국과 중국이 설계한 AI 모델을 그대로 수입하여 쓰는 ‘단순 소비자’에 머물렀던 중견국들이, 이제 집단 연대를 통해 글로벌 AI 거버넌스와 규범을 매개하는 주요 행위자(Rule-setter)로 격상되고 있다.

특정 강대국의 단일 클라우드에 묶여 있던 록인(Lock-in) 효과가 약화되고, 다수 국가의 공공 파운데이션 모델이 느슨하게 결합된 다극화(Multipolarity) 체제가 형성된다. 이는 각국의 고유한 문화적, 언어적 맥락을 반영하는 맞춤형 AI 생태계가 부상함을 뜻하며, 극단적인 빅테크 독점 체제에 파열음을 내는 가장 구조적인 위협이 된다.

전략적 유연성의 갈림길

다자간 연대 전략을 선택한 중견국들은 향후 3~5년 내 중대한 분기점을 맞이한다.

시나리오 A (제3블록의 연착륙): 국가 간 ‘공유(Share)’ 전략이 성공하여 다국적 컴퓨팅 연합 체계(가칭 ‘글로벌 소버린 클라우드’)가 가동된다. 특정 강대국이 AI 칩 수출을 통제하거나 기술 접근을 막더라도, 동맹국의 백업 인프라를 통해 위기를 흡수하는 완벽한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한다.

시나리오 B (자원의 한계와 재종속): 연대국들 간의 데이터 주권 및 개인정보 보호법 충돌로 인해 다자간 연합 체계 구축이 지연된다. 결국 연산력 부족의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미국의 빅테크 클라우드에 굴복하는 ‘정렬(Align)’ 경로로 강제 회귀한다.

한국형 소버린 AI의 청사진을 다시 그리다

️ 정책 시사점

한국 정부와 정책 입안자들은 ‘독자적 파운데이션 모델의 100% 국산화’라는 비현실적 목표를 폐기해야 한다. 대신 채텀하우스가 제시한 ‘전문화’와 ‘공유’ 전략을 결합해야 한다. **반도체 메모리(HBM)라는 강력한 지렛대(Specialize)를 활용하여 캐나다, 호주, 주요 유럽 국가들과 상호 컴퓨팅 자원 및 양질의 공공 데이터를 교환하는 ‘중견국 소버린 AI 동맹’**구축에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공급망이 끊기더라도 언제든 공급자를 바꿀 수 있는 ‘멀티 벤더(Multi-vendor) 전략’을 공공 기관 AI 도입 가이드라인의 최우선 원칙으로 입법화해야 한다.

사업 및 투자 시사점

기업과 투자자들은 빅테크의 범용 대형 모델(AGI)과 직접 경쟁하려는 무모한 투자를 멈춰야 한다. 자본의 방향은 ‘전략적 유연성’을 담보하는 인프라로 향해야 한다. 특정 클라우드에 종속되지 않고 여러 퍼블릭 클라우드와 온프레미스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AI 워크로드를 분산 처리하는 ‘멀티/하이브리드 클라우드 오케스트레이션’ 기술을 보유한 B2B 솔루션 기업의 밸류에이션이 폭발할 것이다.

또한 막대한 연산 자원이 뿜어내는 열을 제어하고 에너지를 자급자족하는 데이터센터 전력망(액침 냉각, SMR 연계 등) 기술이 소버린 AI 생태계의 숨은 최고 수혜주가 될 것이다.

환상을 깬 자들의 연대

채텀하우스의 보고서는 기술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전 세계 정책 입안자들에게 뼈아픈 현실 인식을 안겨주었다. 초거대 AI 시대에 단일 중견국이 완벽한 기술적 섬을 구축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오만이다.

진정한 주권은 고립이 아니라, 영리한 상호 의존과 다자간 연대 속에서 피어난다. 거대한 자본을 앞세운 두 마리 고래의 틈바구니에서, 돌고래들은 스스로의 약점인 컴퓨팅 파워를 공유라는 이름의 스크럼으로 메우며 새로운 생존의 해답을 써 내려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톨게이트를 묵묵히 지나갈 것인가, 아니면 연대를 통해 비용을 나누어 내고 우회로를 뚫어낼 것인가. 2026년, 글로벌 지정학의 가장 첨예한 전선은 땅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클라우드 서버망 위에 그어지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들]

미래 신호: 중견국 연합이 공동의 자금으로 구축한 초국가적 ‘퍼블릭 GPU 데이터센터 클러스터’가 제3국에 세워지고, 참여국 연구진이 이를 클라우드로 분할 사용하는 모델 가시화.

시스템 영향: 공공 및 금융 섹터에서의 빅테크 클라우드 단독 입찰 제한 및 오픈소스 기반 멀티 클라우드 의무화 규정이 글로벌 무역 장벽의 새로운 표준으로 부상.

⚖️ 분기점: 미국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우방국(중견국) 간의 HBM 반도체 및 AI 서버 교역에 대해서도 제3자 수출 통제(FDPR)를 적용하려는 시도 발생 여부.

[전략가의 질문]

️ 우리 정부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국가 초거대 AI 인프라 사업에서, 해외 빅테크에 대한 록인(Lock-in) 리스크를 평가하고 즉각적인 벤더 전환이 가능한 출구 전략을 보유하고 있는가?

국내 통신사 및 IT 서비스(SI) 기업들은 빅테크의 모델을 재판매하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 중견국 간의 ‘공유(Share)’ 생태계를 연결할 멀티 클라우드 오케스트레이션 역량을 내재화하였는가?

소버린 AI 구축의 필수 요건인 ‘데이터 현지화(Data Localization)’ 규제가 전 세계적으로 강화될 때, 물리적 데이터센터 구축 없이도 가상의 분산 환경에서 연합 학습(Federated Learning)을 가능하게 하는 보안 스타트업은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