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산업의 운명을 가를 산업가속화법(IAA)의 제정 과정에서 폐쇄적인 ‘Made in Europe’과 개방적인 ‘Made with Europe’의 노선 투쟁이 격화되고 있다. 한국은 유럽의 청정 전환 딜레마를 파고들어,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로서 이 거대한 요새의 도개교를 내려야 할 결정적 시점을 맞이했다.
전치사 하나의 전쟁, In과 With
2026년 3월 4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유럽 대륙의 산업 지도를 통째로 바꿀 거대한 청사진을 꺼내 들었다. 2035년까지 EU 역내 제조업 비중을 국내총생산(GDP)의 20%로 끌어올리겠다는 선언과 함께 ‘산업가속화법(IAA)‘을 공식 발의한 것이다. 공공 조달 시 저탄소 철강의 25%, 콘크리트의 5%를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구체적 수치까지 명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와 독일 베를린, 그리고 브뤼셀의 복도에서 벌어지는 진짜 전쟁은 단 하나의 전치사에서 촉발되었다. 미래의 산업은 오직 유럽 ‘안에서(In)’ 만들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동맹국 ‘과 함께(With)’ 만들어져야 하는가. 이 질문의 기저에는 날카로운 딜레마가 도사리고 있다. 유럽이 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겹겹이 ‘녹색 요새(Green Fortress)‘의 성벽을 높이 쌓을수록, 역설적으로 청정에너지 전환 비용이 치솟고 다국적 가치사슬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파괴적 결과가 잉태되고 있는 것이다.
규제의 성벽을 높이는 자들
초기 법안의 뼈대는 완고한 요새화에 맞춰져 있다. RTL 투데이와 AFP의 3월 보도를 종합하면, 산업 쇠퇴를 막기 위한 강경파들은 글로벌 제조 역량에서 단일 국가의 지배력이 40%를 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강력한 조항을 밀어붙였다. 특히 배터리, 전기차, 태양광 등 전략 부문에서 1억 유로 이상의 외국인 직접투자(FDI)가 발생할 경우, 최소 50%의 고용을 유럽 내에서 창출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이 신설되었다.
이는 사실상 중국 자본의 우회 진입을 차단하겠다는 의도지만, 불똥은 글로벌 공급망에 엮인 모든 다국적 기업으로 튀고 있다. 프랑스를 필두로 한 강경파들은 보조금과 공공 조달의 혜택을 온전히 ‘유럽산’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벽의 벽돌을 나르고 있다. 하지만 이 높고 단단한 성벽 안에서, 정작 유럽의 공장들은 예상치 못한 질식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용의 역설과 끊어진 사슬
성벽이 높아질수록 내부의 경고음도 커지고 있다. 유럽 최고 권위의 경제 싱크탱크 브뤼겔(Bruegel)은 2월 보고서를 통해 엄격한 원산지 규정이 오히려 비용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여 유럽의 녹색 전환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독일 킬 세계경제연구소(Kiel Institute) 역시 3월 19일 발표한 분석에서, 이 법안이 폐쇄적 자국 우선주의로 흐를 경우 혁신 경쟁을 저해할 것이라며 미래지향적 전략으로의 수정을 촉구했다.
유럽은 태양광 패널부터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광물에 이르기까지 외부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외부의 값싸고 질 좋은 부품과 기술력 없이, 오직 역내의 비싼 인건비와 제한된 자원만으로 2035년 제조업 20% 달성과 탄소중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바로 이 ‘비용의 역설’이 발생하는 지점에, 굳게 닫힌 요새의 도개교를 내릴 외부의 강력한 파트너가 들어설 공간이 생겨난다.
한국의 승부수: ‘Made with Europe’의 조력자
한국 산업계는 이 균열을 정확히 파고들어야 한다. 브뤼겔과 독일 마셜 펀드(GMF) 등 주요 오피니언 리더들이 연일 외치고 있는 ‘Made with Europe(유럽과 함께 제조)’ 전략은 한국 기업에게 단순한 생존의 문제를 넘어 글로벌 밸류체인을 주도할 패권적 기회다. 한국은 고효율 배터리, 차세대 전력망, 수소 모빌리티 등 유럽이 녹색 요새를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첨단 ‘무기’를 쥐고 있다.
한국은 이 법안을 무역 장벽으로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기술 자본이 유럽의 청정 전환 비용을 극적으로 낮출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야 한다. 유럽의 1억 유로 단위 대규모 프로젝트에서 한국 기업이 단순한 하청업체가 아닌, 절반의 고용 창출 의무를 함께 분담하는 전략적 공동 투자자(JV)로 포지셔닝할 때, 유럽은 기꺼이 우리를 향해 도개교를 내어줄 것이다. 과연 이 거대한 성문의 열쇠는 누구의 손에 쥐어질 것인가.
동맹국과의 룰 세팅 분기점
IAA 법안의 최종 타결을 앞두고 글로벌 무역 규범은 두 가지 거대한 시나리오의 갈림길에 서 있다.
시나리오 A (닫힌 요새의 완성): 프랑스 중심의 강경한 ‘Made in Europe’ 노선이 승리하는 경로다. 40% 단일 국가 캡(Cap)과 50% 역내 고용 조건이 예외 없이 적용되며,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 대한 우대 조치도 축소된다. 이 경우 한국의 수출 주도형 모델은 심각한 타격을 입으며, 천문학적인 자본을 들여 유럽 본토에 공장을 직접 짓는 출혈 경쟁이 불가피해진다.
시나리오 B (프렌드쇼어링과 ‘Made with’의 승리): 독일과 주요 싱크탱크의 실용주의적 조언이 수용되는 경로다. 기후 리더십 그룹 위민비즈니스연합(We Mean Business Coalition)이 2월 분석에서 지적했듯, 과거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동맹국 광물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던 선례를 유럽이 따르게 된다. 한국을 비롯한 신뢰할 수 있는 FTA 체결국은 ‘Made with’의 핵심 파트너로 분류되어 보조금과 공공 조달의 장벽을 프리패스로 통과하게 된다.
전략적 시사점
️ 정책 및 사회적 시사점
통상 외교의 최우선 과제: 한국 정부는 당장 브뤼셀과 베를린을 향해 ‘Made with Europe’ 노선에 힘을 싣는 전방위적 통상 외교를 가동해야 한다. 우리의 FTA 지위를 지렛대 삼아, 한국산 핵심 소재와 부품이 IAA의 로컬 컨텐츠(Local Content) 요건 산정 시 ‘유럽산’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도록 명문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사회적 파급 효과: 이 법안이 시나리오 B로 안착할 경우, 한국 내 청정 기술 기반의 수출 기업들은 거대한 유럽 공공 조달 시장에 진입하며 양질의 국내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반면 강경 노선이 채택될 경우, 국내 제조 역량의 급격한 유럽 엑소더스(Exodus)로 인한 산업 공동화 우려에 직면하게 된다.
조기 경보 지표: 유럽 의회 내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산업 장관들이 공동 명의로 발표하는 IAA 수정안의 세부 조항 타협안, 특히 ‘우방국 예외(Friendshoring Exemption)’ 조항의 포함 여부가 핵심 지표다.
비즈니스 및 투자 시사점
기업가: 자동차 및 청정에너지 분야의 다국적 기업은 더 이상 유럽으로의 단순 직수출에 의존할 수 없다. 1억 유로 이상의 외국인 직접투자(FDI)에 붙는 까다로운 조건들을 우회하기 위해, 유럽 현지 기업과의 조인트벤처(JV) 설립을 가속화해야 한다. 현지 기업의 껍데기를 쓰되 핵심 기술 지식재산권(IP)은 통제하는 정교한 지배구조 설계가 필수적이다.
투자자: 사모펀드와 인프라 투자자들은 유럽 내에서 탄소 저감형 철강, 그린 콘크리트 인프라를 구축하는 유럽 현지 강소기업의 지분을 선제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IAA의 공공 조달 의무화 비율(철강 25%, 콘크리트 5%)이 보장하는 확실한 매출 파이프라인을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밸류체인 전환: 공급망의 상류(원자재)는 특정 국가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다변화 비용이 급증할 것이며, 하류(최종 조립 및 공공 납품) 영역에서는 ‘유럽 프리미엄’을 얻기 위한 치열한 합종연횡이 전개될 것이다.
요새를 넘어 거대한 장터로
2022년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들 역시 강경한 ‘바이 아메리칸’을 외치며 거대한 장벽을 세웠다. 그러나 현실의 얽히고설킨 밸류체인 앞에서 그들은 결국 동맹국이라는 이름으로 슬며시 도개교를 내렸다. 지금 유럽이 쌓아 올리고 있는 녹색 요새 역시 마찬가지다. 2035년 제조업 20% 부활이라는 원대한 꿈은 결코 고립된 성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한국은 이 성벽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불청객이 아니라, 성 안의 모순과 비용 부담을 덜어줄 가장 확실한 해결사로 나서야 한다. ‘Made in Europe’이라는 폐쇄적 꼬리표 대신, ‘Made with Europe’이라는 거대한 공동의 장터를 열쇠로 쥐어줄 때, 비로소 우리는 대륙의 산업 패권이 요동치는 이 폭풍 속에서 온전한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주목해야 할 것들
미래 신호: 환경 규제(녹색 전환)가 무역 장벽이자 자국 산업 육성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화 수단으로 전락하는 신보호무역주의의 구조화.
⚖️ 분기점: 미국발 IRA 충격에 대한 맞대응으로 시작된 유럽의 IAA가, 종국에는 미국 및 아시아 동맹국을 포함하는 거대한 ‘자유주의 경제 블록’으로 통합될 것인지의 여부.
전략 창: 보조금 수혜 조건인 ‘역내 고용 50% 창출’을 만족시키기 위해, 대규모 생산 인력이 필요 없는 고도화된 AI 스마트 팩토리 기술을 선제적으로 유럽 현지에 도입하는 전략.
§. 전략가의 질문
️ 유럽이 중국 자본을 배제하기 위해 설정한 40% 시장 지배력 상한선이, 역으로 배터리 분야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가진 한국 기업의 발목을 잡을 때 어떤 협상 카드를 꺼낼 것인가?
️ 글로벌 환경 표준과 원산지 규정이 통합되어 가는 과정에서, 한국 국내의 재생에너지(RE100) 조달 환경은 유럽의 기준을 충족시킬 만큼 충분히 빠른 속도로 개선되고 있는가?
수출 중심의 기존 밸류체인 구조를 유럽 현지화 모델로 뜯어고칠 때 발생하는 초기 전환 비용(CAPEX)을 상쇄할 만한 장기적 시장 점유율 획득 시나리오는 수립되어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