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10년 뒤의 기후 재앙을 막기 위해 모아두었던 국가의 비상금이, 당장 내일의 지정학적 위협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 구매비로 강제 전환되고 있다. 한정된 국가 재정이라는 좁은 파이 속에서 ‘국방’과 ‘기후’는 이제 완벽한 제로섬(Zero-Sum) 게임의 경쟁자가 되었다. 해적을 막기 위해 배에 무거운 대포를 싣느라, 정작 배 밑바닥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수리할 시간과 자본이 모두 증발하는 치명적인 모순이 시작되었다.
가라앉는 배를 지키기 위해 대포를 사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발표한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글로벌 국방비 지출은 2조 5천억 달러를 돌파하며 역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는 단순히 무기를 조금 더 샀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기를 사는 데 쓰인 1달러는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노후 전력망을 교체할 1달러의 영구적인 증발을 의미한다.
고금리와 인플레이션으로 각국 정부의 재정 여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새로운 세수를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방비를 10% 증액하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부처의 예산을 10% 삭감해야만 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된 것은 아직 눈앞에 닥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기후 변화 대응 예산’이었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기후 재정의 심각한 붕괴를 경고했다. 당장의 생존을 위협하는 안보 공포가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생존 기반인 기후 투자를 차갑게 식혀버리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전 세계를 이토록 맹목적인 재무장의 늪으로 몰아넣은 것일까?
두 개의 전쟁이 쏘아 올린 군비 확장 도미노
이 거대한 제로섬 게임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명백히 두 개의 거대한 지정학적 충돌이다. 먼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이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평화주의의 환상을 완전히 산산조각 냈다. 독일은 ‘시대 전환(Zeitenwende)‘을 선언하며 1,000억 유로의 특별 국방 기금을 편성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은 앞다투어 국방비 가이드라인을 GDP의 2% 이상으로 상향 조정했다.
불길은 유럽에만 머물지 않았다. 미국-이란 간의 지속적인 무력 충돌과 긴장 고조는 중동 전역을 화약고로 만들며 주변국들의 방공망 및 미사일 투자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렸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여파가 아시아 지역으로 고스란히 전이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안보 우산이 분산될 것을 우려한 일본, 대만, 그리고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 역시 자체적인 억제력 확보를 위해 국방비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결국 전 세계가 ‘내일의 평화’를 포기하고 ‘오늘의 무장’을 선택하는 거대한 군비 경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하지만 이 청구서는 단순히 회계 장부상의 숫자 이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치명적 제로섬: 무기가 되어버린 기후 예산
국제에너지기구(IEA)의 분석가들은 각국 정부가 단기적 생존을 위해 친환경 보조금과 에너지 전환(Energy Transition) 인프라 투자를 공격적으로 유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풍력 발전소를 세워야 할 철강과 자본이 포탄과 탱크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쉴 새 없이 흘러 들어가고 있다.
유럽연합(EU) 내에서도 이러한 갈등은 이미 현실화되었다. 탄소 중립을 위한 ‘그린 딜(Green Deal)’ 예산의 상당 부분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과 역내 방위력 강화 명목으로 전용되기 시작했다.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힘겹게 조성된 ‘녹색 자본’마저 안보라는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셈이다.
이러한 예산의 탈취는 기존의 가치관마저 기묘하게 뒤틀고 있다. 가장 파괴적인 무기를 생산하는 방위산업이 스스로를 지속가능성의 수호자로 포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방산업체들은 어떻게 환경 단체들의 논리를 훔쳐 오고 있을까?
국방이 곧 ESG? 녹색 자본의 구조적 변질
최근 유럽의 주요 방산업체들은 “국가 안보가 보장되지 않으면 어떠한 지속가능성(ESG)도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전방위적인 로비를 펼치고 있다. 이들은 무기 생산을 ESG의 ‘사회(Social)’ 또는 ‘거버넌스(Governance)’ 필수 요건으로 재정의하여, 녹색분류체계(Taxonomy)에 방위산업을 편입시키려 시도 중이다.
만약 이들의 로비가 성공한다면, 글로벌 금융 시장의 거대한 흐름이 뒤바뀐다. 연기금과 국부펀드가 운용하는 막대한 ‘ESG 펀드’의 자금이 태양광 기업 대신 미사일 제조사의 주식을 사들이는 데 합법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라앉는 배를 수리할 자금으로 성능 좋은 대포를 사면서, 그것이 배를 위한 ‘친환경적 투자’라고 주장하는 기만적인 상황이다. 안보와 기후가 정면충돌하는 이 위태로운 항로는 결국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영구적 전시 경제 vs. ‘녹색 안보’의 결합
한정된 예산을 둘러싼 이 거대한 줄다리기는 향후 10년의 글로벌 경제를 두 가지 경로로 나누게 된다.
시나리오 A (영구적 전시 경제의 고착화): 지정학적 갈등이 상시화되면서 국방비가 국가 예산의 최우선 순위를 영구적으로 장악한다. 에너지 전환은 사치스러운 의제로 전락하고, 각국은 파리기후변화협약의 목표치를 줄줄이 폐기한다. 군사적으로는 안전해졌을지 모르나, 기후 재앙으로 인해 식량 안보와 국경이 무너지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시나리오 B (‘녹색 안보’ 모델의 등장): 기후 투자와 안보 투자를 억지로 융합하는 새로운 예산 모델이 등장한다. 정부는 군부대의 전력을 100% 독립된 마이크로그리드(재생에너지)로 전환하거나, 군용 차량을 친환경 연료 기반으로 교체하는 등 ‘이중 용도(Dual-use)’ 기술에 예산을 집중한다. 국방 예산을 통해 역설적으로 에너지 전환의 마중물을 제공하는 타협안이다.
와일드카드 (국방 탄소 발자국의 강제 공개): UN 등 국제기구가 그동안 기후 협약의 예외 성역으로 인정받아 온 군대와 방위산업의 막대한 탄소 배출량을 의무적으로 측정하고 규제하는 국제법을 통과시킨다. 이로 인해 무분별한 군비 확장에 강력한 제동이 걸린다.
정책 및 투자 지형의 재편
️ 정책 및 사회적 시사점
정부와 국회는 예산 편성 과정에서 ‘안보 딜레마’에 매몰되어 인류 공동의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국방 예산을 증액하더라도, 그 재원이 재생에너지 및 친환경 기술 도입과 연계되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사회적으로도 ‘외부의 적’에 대비하는 군사 안보만큼이나 기후 변화라는 ‘보이지 않는 적’에 대응하는 기후 안보가 동등한 가치를 지님을 합의해 내야 한다.
비즈니스 및 투자 시사점
단기적으로 글로벌 자산 시장에서 방위산업 기업들은 정부의 막대한 예산 몰아주기에 힘입어 초과 이익(Alpha)을 달성할 것이다. 반면, 순수 재생에너지 및 기후 테크 스타트업들은 정부 보조금 축소와 자금 조달 한파에 직면할 위험이 매우 높다. 투자자들은 방산과 기후 테크의 이분법적 접근을 넘어, 국방과 민간 인프라 모두에 적용 가능한 ‘기후 적응(Climate Adaptation)’ 기술 및 에너지 자립형 전력망 솔루션을 보유한 기업으로 포트폴리오의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한다.

대포의 포연이 가려버린 기후의 골든타임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피어오른 포연은 단순히 영토의 지도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지구의 미래를 결정지을 거대한 자금의 지도를 영구적으로 변형시켰다. 국가의 금고는 비어 가고, 한 번 방향을 튼 2조 5천억 달러의 예산은 쉽게 기후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가라앉는 배 위에서 누가 더 큰 대포를 가질 것인가를 두고 처절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무기를 벼리는 쇳소리가 높아질수록, 배 밑바닥을 수리할 골든타임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다. 가장 완벽하게 무장한 채로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배, 그것이 이 제로섬 게임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이 되지 않도록 지금 당장 키를 돌려야 할 때다.
주목해야 할 것들
미래 신호: 유럽연합(EU) 등 주요 선진국에서 방위산업을 공식적인 ‘사회적 기여(Social)’ 산업으로 분류하여 지속가능채권(ESG Bond) 발행 요건에 포함시키려는 입법 시도의 통과 여부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시스템 영향: 기후 변화에 취약한 개발도상국(글로벌 사우스)에 지급하기로 약속했던 선진국들의 ‘기후 손실과 피해 기금(Loss and Damage Fund)’ 납입이 각국의 국방비 예산 부족을 핑계로 전면 보류되거나 축소될 위험이 매우 크다.
⚖️ 분기점: 극단적인 이상 기후로 인해 자국 내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최신 전투기 구매에 천문학적인 세금을 쓰면서 재난 복구와 기후 인프라에는 돈을 쓰지 못하는 정부를 향한 시민들의 광범위한 조세 저항이 일어날 분기점이 다가오고 있다.
전략가의 질문
️ 만약 내년에 기후 재난으로 국가 주요 산업 단지가 침수될 위험이 높은데, 가용 예산은 최신 방공망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모두 묶여 있다면 정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안보와 기후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 위험을 동시에 방어할 수 있는 융합형 재난-안보 예산 체계를 지금 설계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 그동안 파리기후변화협약 등에서 예외로 인정받으며 무제한의 화석 연료를 써 온 군대와 방위산업의 탄소 배출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국가 전체의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방 부문의 친환경 전환’이라는 매우 껄끄러운 의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 할 시점이다.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을 받으며 성장해 온 우리의 친환경 비즈니스 모델은, 정부가 보조금을 전면 끊고 그 돈을 국방비로 돌렸을 때도 자생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구조인가? 규제 환경의 급변과 보조금 절벽에 대비하여 완벽히 독립적인 수익 창출 시나리오를 가동해야 한다.
글로벌 자본이 ESG 펀드라는 명목하에 무기 제조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진정한 의미의 ‘녹색 산업’ 기준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투자자들은 단순히 라벨링 된 ESG 등급을 믿을 것이 아니라, 자본이 실질적으로 지구의 기후 위험을 낮추는 데 쓰이고 있는지 철저하게 이면을 실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