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의 순환 경제가 ‘착한 기업’의 개별적 분투였다면, 이제는 가치사슬 전체가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묶이는 ‘비즈니스 모델의 팀플레이’가 시작됐다. 핀란드 혁신 기금 Sitra가 던진 이 화두는, 순환 경제가 왜 지금까지 돈이 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대답을 담고 있다.

‘선한 의지’가 수익을 보장하지 않는 이유

지금까지 많은 기업이 제품을 재활용하고 수명을 늘리려 노력해 왔지만, 자본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현행 금융 시스템은 철저히 개별 기업의 재무 건전성만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제품을 더 오래 쓰게 만드는 기업은 단기 매출이 줄어들고, 수거 업체는 원청의 지원 없이는 수익성을 맞추기 어렵다. 각자도생의 선형 경제 구조 안에서 ‘순환’은 누군가의 손실을 전제로 하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하지만 최근 핀란드 혁신 기금 Sitra는 이 판을 뒤흔드는 새로운 공식을 제안한다. 바로 ‘순환 협력형 비즈니스 모델(CCBM)‘이다. 이는 원재료 공급사부터 제조사, 서비스 운영사, 폐기물 처리 업체까지 가치사슬 내 모든 이해관계자가 리스크와 수익을 어떻게 나눌지 사전에 설계하는 모델이다. 협력의 성과를 공동의 지갑으로 관리하자는 이 제안은, 순환 경제를 ‘윤리’의 영역에서 ‘자본’의 영역으로 강제 이동시키고 있다.

무엇이 바뀌는가: 가치사슬이 하나의 ‘차입 단위’가 된다

Sitra가 제시한 모델의 핵심은 ‘협력형 금융(Collaborative Finance)‘이다. 현재 확인된 사실(L1)에 따르면, 북유럽의 일부 선도적 은행들은 개별 기업이 아닌 ‘가치사슬 프로젝트’ 전체에 자금을 빌려주는 방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가구 제조사가 제품을 판매하지 않고 대여(Product-as-a-Service)할 때 발생하는 현금 흐름을 제조사, 수선 업체, 재활용 업체가 미리 합의된 비율로 나누는 계약을 맺으면, 은행은 이 계약 전체를 담보로 저금리 대출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 동력은 ‘다자간 수익 공유 계약’이다. 제품 수명이 길어질수록 모든 참여자의 이익이 커지도록 인센티브를 정렬하는 것이 골자다. 제조사는 판매량 감소를 대여료 수익 공유로 보전받고, 재활용 업체는 고품질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함으로써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이는 단순히 협력을 독려하는 수준을 넘어, 계약서와 금융 상품이라는 단단한 토대 위에 순환 생태계를 구축하는 시도다.

왜 이 신호가 중요한가: 선형 경제 금융의 종말

이 이슈가 단순한 정책 제안을 넘어 강력한 신호가 되는 이유는 기존 금융 시스템의 취약점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신용 평가 모델은 제품이 빨리 팔리고 폐기될수록 기업의 회전율이 높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탄소 국경세와 자원 고갈이 현실화된 시대에 이런 ‘선형적 성장’은 오히려 리스크다.

Sitra의 보고서는 금융 기관이 순환 경제에 돈을 빌려주지 않는 이유가 ‘위험해서’가 아니라 ‘평가할 틀이 없어서’라고 지적한다. 현재 실증 단계(L2)에 있는 ‘순환 연계형 대출(Circularity-Linked Loans)‘은 기업의 자원 순환율이 높아질수록 금리를 낮춰준다. 이는 기업들에게 “순환하지 않으면 자본 비용이 비싸질 것"이라는 실질적인 압박으로 작용한다. 결국 ‘순환 협력’은 기업들이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싼 이자로 돈을 빌리기 위해’ 선택하는 필수 전략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데이터가 만드는 신뢰의 인프라

이 모델이 실제 작동하려면 가치사슬 내에서 제품이 어디에 있고, 어떤 상태인지 실시간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여기서 2027년 도입 예정인 EU의 ‘디지털 제품 여권(DPP)‘이 결정적인 촉매제 역할을 할 전망이다(L1). 제품의 전 생애주기 데이터가 투명하게 공개되면, 금융 기관은 가치사슬 전체의 잔존 가치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게 된다.

앞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표는 개별 기업의 매출 성장률이 아니라, 특정 가치사슬 내에서 자원이 몇 번이나 회전하며 수익을 창출하는지를 나타내는 ‘순환 가치 창출률’이다. 또한, 한국처럼 제조 기반이 강한 국가에서는 대기업이 협력사들과 어떤 수익 공유 계약을 맺는지, 그 계약이 금융권에서 신용으로 인정받는지 여부가 글로벌 공급망 경쟁력을 가르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이해관계자 시사점

비즈니스 및 투자 관점

새로운 투자 테마의 등장: 개별 기업 투자에서 ‘가치사슬 펀드’로의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제품 판매가 아닌 ‘성능 기반 서비스’ 모델을 운용하는 기업 그룹이 장기적으로 더 안정적인 배당 수익을 제공할 수 있다.

리스크 관리: 공급망 내 파트너 한 곳의 부도가 전체 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파트너 선정 시 재무 상태뿐 아니라 ‘순환 협력 의지’를 핵심 실사(Due Diligence) 항목에 포함해야 한다.

️ 정책 및 사회적 관점

K-순환 금융 제도 설계: 국내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순환 경제 프로젝트로 묶일 때 정부 보증이나 금리 혜택을 주는 ‘협력형 순환 금융’ 정책 도입이 필요하다.

표준 계약서 보급: 이해관계자 간의 복잡한 수익 배분과 책임 소재를 규정하는 ‘순환 협력 표준 계약서’를 개발하여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진입 장벽을 낮춰줘야 한다.

결론

순환 경제의 완성은 기술적 돌파구가 아니라 ‘돈을 나누는 방식의 혁신’에서 온다. Sitra가 제시한 협력 모델은 우리에게 세 가지 통찰을 남긴다. 첫째, 지속가능성은 이제 재무팀과 전략팀의 핵심 과제다. 둘째, 데이터(DPP)는 신뢰를 수치화하여 자본을 끌어오는 도구가 된다. 셋째, 미래의 경쟁력은 ‘얼마나 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연결되어 수익을 방어하느냐’에서 결정된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함께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경제적 해답이다. 지금은 일부 선도적인 유럽 기관의 제안일 뿐이지만, 자원 안보와 자본 비용의 압박이 거세질수록 이 ‘순환 협력’의 악보는 글로벌 산업계의 표준 교향곡이 될 것이다.


생각해볼 질문

만약 당신이 제품을 팔지 않고 대여하는 비즈니스로 전환한다면, 가장 먼저 손을 잡아야 할 파트너는 누구인가? 그 파트너에게 “함께하면 당신도 돈을 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수치는 무엇인가?

지금 우리 회사의 신용 등급이 ‘자원 순환율’에 따라 결정된다면, 내일 아침 당장 회의 탁자 위에 올려야 할 가장 시급한 지표는 무엇일까?

‍ 제품을 소유하는 것보다 공유하고 수선해 쓰는 것을 선호하는 청년 세대에게, ‘순환 협력 모델’은 단순한 소비를 넘어 어떤 새로운 직업적 기회(예: 순환 가치 평가사, 재제조 기획자 등)를 열어줄 수 있을까?

주목해야 할 것들

미래 신호: 개별 기업의 재무제표가 아닌 ‘가치사슬 통합 재무제표’가 공시되는 시대가 올 수 있다. 투자자들이 특정 브랜드의 제품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순환되는지를 보고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세상이다.

⚡ 확산 조건: 이 모델이 트렌드로 안착하려면 ‘순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추가 비용(수거, 세척, 수선 등)을 상쇄할 만큼의 금융 혜택(파격적인 금리 인하 등)이 제공되어야 한다. 정책 금융의 초기 마중물 역할이 핵심이다.

모니터링 포인트: 대형 시중 은행들이 ‘순환 경제 전담 데스크’를 신설하거나 관련 금융 상품을 출시하는지 살펴야 한다. 자본의 움직임이 포착되는 순간, 이 신호는 주류 트렌드로 편입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