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철저한 분업의 예술이었다. 하지만 공정 미세화 공정(무어의 법칙)이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그 단단했던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다. 팹리스가 파운드리를 건너뛰고 장비사와 직접 손을 잡는 현상은 단순한 파트너십이 아니다. 이는 가장 완벽한 칩을 만들기 위해 밸류체인의 중간을 지워버리려는 주도권 쟁탈전의 서막이다. 한국 반도체가 기대온 성공 공식은 이 지각변동 속에서 유효할 것인가.
장비사 1위와 팹리스의 만남, 릴레이 경주의 룰이 바뀌다
게리 디커슨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5월 브로드컴과의 협력을 발표하며 “반도체 기술이 개발되고 상업화되는 기존의 방식을 바꾸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밝혔다. 파운드리를 중심으로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던 기존 밸류체인에 균열이 생겼다. 가장 완벽한 칩을 만들기 위해 제조를 담당하는 파운드리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칩 설계 기업이, 오히려 파운드리의 제조 병목을 뚫기 위해 공정 장비 기업과 직거래를 시작하는 딜레마가 발생한 것이다.
중간을 지운 직통 라인, EPIC 플랫폼의 가동
미국 실리콘밸리에 구축 중인 어플라이드의 EPIC 센터가 그 무대다. 연내 가동을 목표로 하는 이 연구개발(R&D) 허브에 맞춤형 인공지능(AI) 칩 설계의 강자인 브로드컴이 합류했다. 앞서 4월에는 글로벌 테스트 장비 1위인 아드반테스트(Advantest)도 전략적 파트너로 이름을 올렸다. 마치 도면을 그리는 건축가와 뼈대를 올릴 크레인을 만드는 제조사가 중간 시공사를 건너뛰고 기초 설계부터 입을 맞추는 격이다. 차세대 패키징 기술을 시장에 내놓기 위한 거대 기업들의 가상적 수직계열화가 시작되었다.
패키징 기술이 주도권을 잡은 이유 현재1~2나노미터 수준에 도달한 초미세 공정은 막대한 투자 비용 대비 성능 향상 폭이 크게 둔화되고 있다. 반면에 연산을 담당하는 로직 칩(GPU 등)과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서로 다른 공정으로 만든 칩들을 하나의 패키지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기술이 비용과 성능 면에서 훨씬 유리해졌다. 또한 AI 가속기 시장의 심각한 공급 부족 원인이 칩 생산 자체보다는 TSMC의 CoWoS 같은 ‘첨단 패키징 용량 부족’에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패키징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번 장비사와 설계사 간의 직접적인 동맹은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에만 의존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공급망 전반의 파트너들이 초기 설계 단계부터 융합하는 반도체 생태계의 전면적 재편을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순차적 하청의 종말, 병렬적 공동 개발의 시작
이 만남은 순차적 하청 관계의 붕괴를 뜻한다. 지금까지 팹리스는 설계를 파운드리에 넘기고, 파운드리는 장비사의 기계를 사들여 칩을 만들었다. 하지만 딜로이트의 2026년 분석에 따르면, 생성형 AI 칩은 전체 물량의 0.2%에 불과함에도 업계 수익의 절반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엄청난 부가가치를 감당할 첨단 패키징(Advanced Packaging) 인프라는 극도로 부족하다. 브로드컴은 특정 파운드리가 독점한 패키징 병목을 기다리는 대신, 장비사와 직접 기술을 최적화하여 칩 출시 속도(Time-to-Market)를 앞당기는 길을 택했다.
타임투마켓 전쟁, 표준을 쥔 자가 시장을 쥔다
핵심은 표준화다. 어플라이드와 브로드컴의 협력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면, 그들이 개발한 여러 칩을 하나로 묶는 이종 집적(Heterogeneous Integration) 기술은 향후 업계의 새로운 패키징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설계 단계부터 장비의 특성을 완벽히 이해하고 만들어진 칩은 양산 수율을 획기적으로 높인다. 이 직통 라인이 안착한다는 전제하에, 경쟁 팹리스 기업들 역시 파운드리의 독자 규격에 얽매이지 않고 어플라이드의 플랫폼으로 모여들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대만을 흔들고 한국에 던져진 생존 질문
이 연합 전선은 글로벌 반도체 거인들의 셈법을 복잡하게 만든다.
대만 TSMC의 해자 훼손: 가장 큰 직접적 위협을 받는다. TSMC의 강력한 지배력은 단순한 칩 제조를 넘어 ‘CoWoS’로 대표되는 독점적 패키징 인프라에서 나온다. 장비 1위 기업이 표준화된 첨단 패키징 장비 생태계를 만들어 다른 파운드리나 후공정 외주기업(OSAT)에 범용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되면, TSMC가 쥐고 있던 조립의 프리미엄은 크게 희석될 수 있다.
미국 엔비디아의 대안 부상: 현재 엔비디아는 TSMC의 패키징 역량과 강하게 결속되어 있다. 브로드컴이 어플라이드와 함께 빠르고 저렴한 맞춤형 AI 칩 양산 생태계를 구축하면, 비싼 엔비디아 칩에 지친 거대 기술 기업(하이퍼스케일러)들에게 매력적인 독립 노선이 열린다.
한국 SK하이닉스의 다각화 과제: 현재 엔비디아-TSMC 생태계에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며 황금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브로드컴 주도의 대안 생태계가 커질 경우, SK하이닉스는 특정 파운드리에 종속되지 않는 개방형 패키징 표준에도 완벽히 호환되는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준비해야 한다.
한국 삼성전자의 기회와 위협: 메모리와 파운드리를 모두 가진 삼성에게는 판을 뒤집을 기회이자 위기다. 어플라이드의 범용 패키징 장비 기술이 성숙해지면,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이를 도입해 TSMC와의 기술 격차를 단숨에 좁힐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삼성전자가 자랑하는 ‘턴키(일괄 생산)’ 서비스의 매력이 반감되고, 전체 공정의 주도권을 장비사와 설계사에 내어줄 위험도 동시에 존재한다.
무너진 경계, 칩의 미래는 조립에 있다
이 변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세 가지다. 더 작게 깎는 기술의 시대가 저물고 어떻게 잘 붙이느냐의 시대가 왔으며, 공정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기업들은 기존의 적과 동지를 허물고 있다. 그리고 가장 밑단의 장비가 가장 윗단의 설계를 직접 견인하기 시작했다. AI 인프라 전쟁은 이제 칩의 성능 평가를 넘어 조립 생태계의 권력 투쟁으로 넘어갔다. 도면을 그리는 자와 크레인을 만드는 자가 이미 손을 잡았다. 중간에서 시공을 담당하던 파운드리와, 거기에 벽돌을 대던 한국의 메모리 기업들은 이제 누구와 어떤 도면을 공유할 것인가.
생각해볼 질문
만약 당신이 지금 칩 설계 사업을 이끄는 경영자라면, 독보적이지만 줄을 오래 서야 하는 1등 파운드리를 고집하겠는가? 아니면 직접 장비사와 손잡고 나만의 조립 방식을 빠르게 개척하겠는가?
한국 반도체의 성공은 설계, 생산, 메모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는 구조에 기대어 왔다. 만약 이 역할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누구나 장비사만 거치면 칩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당장 5년 뒤 열린다면, 한국 기업들이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새로운 무기는 무엇일까.
주목해야 할 것들
미래 신호: 장비사와 팹리스의 직거래가 안착하면, 아마존이나 구글 같은 빅테크들이 반도체 설계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장비사와 협력해 자체 칩(자사 실리콘)을 찍어내는 극단적인 내재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팹리스의 입지마저 위협하는 도미노가 된다.
⚖️ 분기점: 어플라이드의 EPIC 플랫폼에서 산출된 패키징 기술이 과연 TSMC의 CoWoS 수율을 언제, 얼마나 따라잡느냐가 관건이다. 비용 편익이 TSMC의 프리미엄을 넘어서는 순간, 하이퍼스케일러들의 대규모 이탈이 시작될 것이다.
연결 이슈: 유리 기판(Glass Substrate) 등 신소재의 상용화 속도를 함께 봐야 한다. 기존 유기 소재 패키징의 한계를 깨는 신소재 공정은 파운드리보다 소재·장비사가 원천 기술을 쥐고 있어, 권력 이동을 가속하는 촉매제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