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 만에 폐기능이 98밀리리터 늘었다. 위약을 받은 환자들의 폐는 62밀리리터 줄었다. 특발성 폐섬유증(IPF) 환자 71명이 중국 21개 병원에서 12주 동안 경험한 결과다. 이 임상을 이끈 약의 이름은 INS018_055. Insilico Medicine이 인공지능으로 설계한 신약이다. 그런데 이 약을 만드는 데 든 비용은 약 600만 달러, 기간은 18개월이었다. 전통적 방법이라면 최소 1억 달러에 6년에서 10년이 걸렸을 과정이다. MIT 테크놀로지 리뷰가 2026년 1월 AI 신약발견을 ‘올해의 10대 혁신 기술’ 중 하나로 꼽은 배경이기도 하다. 숫자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신약을 만들 수 있는 자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임상이 확인한 것
INS018_055는 현재 임상에 들어가 있는 AI 기원 신약 173개 중 처음으로 인체 임상 효능 데이터를 공개한 약이다. 결과는 2026년 1분기 학술지 Drug Development Research(Wiley)에 실렸다.
시험은 네 군(群)으로 나뉘었다. 30mg 1일 1회, 30mg 1일 2회, 60mg 1일 1회, 위약. 가장 효과가 뚜렷한 군은 60mg 1일 1회였다. 이 군의 환자들은 12주 동안 폐활량(FVC)이 평균 98.4밀리리터 늘었다. 위약군에서는 같은 기간 62.3밀리리터 줄었다. 두 군의 차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
이 속도를 가능하게 한 기술이 AlphaFold 3다. 딥마인드가 개발한 단백질 구조 예측 AI로, 지금은 사실상 모든 AI 신약 파이프라인에 통합돼 있다. 신약 후보를 설계하려면 표적 단백질과 후보 물질의 결합 방식을 알아야 하는데, 과거에는 이를 실험실에서 하나하나 확인해야 했다. Drug Target Review의 2026년 분석에 따르면, AlphaFold 3가 그 필요성의 60~70%를 없앴다.
BCG와 웰컴 트러스트의 공동 보고서는 AI를 쓰면 신약발견·전임상 단계의 비용과 시간이 25~50% 줄어든다고 전망한다. INS018_055의 임상 성공은 그 전망이 현실임을 처음으로 확인한 데이터다.

AI가 바꾸지 못하는 것
INS018_055의 성과는 신약 개발 전체의 혁명이 아니다. ‘발견과 전임상’ 구간, 즉 후보 물질을 찾고 동물에서 시험하는 단계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환자를 모집하고 임상을 설계하고 규제 기관의 심사를 받는 과정은 AI가 대체하지 못한다. 이번 임상이 중국의 단일 의료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진 점도 한계다. 미국 FDA나 유럽 EMA, 한국 식약처의 승인을 받으려면 국제 다기관 임상이 따로 필요하다.
진짜 전환점은 조금 뒤에 온다. 지금 임상 중인 AI 기원 신약 가운데 15~20개가 2026년 안에 핵심 임상(pivotal trial)에 진입할 전망이다. 2028년에서 2030년 사이 이 결과들이 쌓이면, AI 신약의 실력이 제대로 판명난다. 지금은 가능성이 확인된 단계다.
한국의 강점과 공백 — 그리고 새로 열린 통로
한국은 임상 역량이 강한 나라다.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등 대형 의료기관들은 글로벌 다국적 임상의 주요 기관으로 오랫동안 이름을 올려왔다. 빠른 환자 모집 속도, 촘촘한 병원 네트워크, 성장한 CRO(임상수탁기관) 산업 덕분에 한국은 매력적인 임상 시험지가 됐다.
그러나 무엇을 임상할지, 즉 신약 후보를 발굴하는 ‘발견’ 단계는 다른 이야기였다. 표적 단백질을 찾고 후보 물질을 설계하고 전임상에서 검증하는 이 과정은 긴 시간과 막대한 자본을 요구한다. 국내 바이오텍과 대학 연구소는 대부분 이 단계를 건너뛰고 해외 기업에서 라이선스를 들여오거나, 임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에 머물렀다. 신약을 발굴하는 사람이 아니라 임상을 대행하는 사람의 위치였다.
AI 신약발견은 이 구조에 구멍을 낸다. 발견 단계의 비용이 1억 달러에서 600만 달러로 낮아지면, 수천억 원의 자본 없이도 신약 후보를 만들 수 있다. 임상 역량을 이미 갖춘 한국 바이오텍과 병원 연구소가 AI를 더하면, 후보 물질 설계부터 임상 검증까지를 국내에서 연결하는 경로가 처음으로 가능해진다.
미국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은 2026년 6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 기회를 살리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다. 단백질·분자 공공 데이터베이스 공유 인프라, 위험 수준에 비례하는 규제 체계, 그리고 민간 투자를 끌어낼 적절한 가격 정책이다. 한국도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 식약처의 AI 신약 가이드라인, 범부처 R&D 데이터 공유 체계, 초기 AI 신약 스타트업에 대한 세제 지원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인프라를 먼저 만드는 쪽이 다음 판의 선수가 된다.

빅파마는 이미 사고 있다
빅파마는 AI 신약 기업을 직접 키우는 대신 사고 있다. Novartis는 AI 신약 플랫폼 기업 Recursion Pharmaceuticals를 인수했고, Sanofi는 Exscientia와의 파트너십을 확대했다. ‘자체 개발’보다 ‘인수 통합’이 더 빠르다는 판단이다.
AI 신약발견 시장은 2025년 43억 5,000만 달러에서 2026년 61억 6,000만 달러로 연 27% 속도로 성장 중이다(Mordor Intelligence). 빅파마의 인수 수요와 시장 팽창이 맞물리면서 AI 신약 플랫폼 기업의 가치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한국 바이오 기업에게 이 흐름은 두 방향의 기회다. 하나는 AI 신약발견 플랫폼 역량을 갖추면 글로벌 M&A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임상 네트워크는 이 협상에서 결정적 차별 요소가 된다. 다른 하나는 빅파마가 외면해온 희귀질환이나 특정 인구집단에 흔한 질환에서, AI로 직접 신약 후보를 설계하는 경로다. 진입 비용이 낮아진 만큼 도전 가능한 영역이 넓어졌다.
2000년대 초 인터넷이 출판과 음악의 진입 장벽을 허물었을 때, 독립 출판사와 인디 뮤지션이 먼저 움직였다. AI 신약발견도 비슷한 국면이다. 대형 자본 없이도 후보 물질을 설계할 수 있는 세계가 열리고 있다. 그 안에서 한국의 임상 역량은 지금보다 훨씬 큰 값어치를 갖는다.
신약 발굴자로 들어갈 것인가, 임상 서비스 제공자에 머물 것인가
1억 달러를 600만 달러로, 8년을 18개월로 줄인 것은 숫자의 변화가 아니다. 신약을 만들 수 있는 자격의 변화다.
한국은 임상 역량을 오랫동안 갈고닦았다. 그러나 그 역량을 신약 발견 단계와 연결할 고리가 없었다. AI가 그 고리를 처음으로 만들고 있다. 임상은 강하나 발견은 약했던 한국 제약 산업의 구조적 한계가, 기술의 변화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 가능해지고 있다.
2028년에서 2030년 사이 지금 임상 중인 AI 신약들의 핵심 결과가 쌓이면 판이 달라진다. 그 전에 발판을 만드는 나라와 기업이 다음 10년 제약 지도를 그린다.
이제 질문은 하나다. 한국은 이 판에 신약 발굴자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임상 서비스 제공자에 머물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