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장에서 가장 두려운 재해는 해킹도, 지진도 아니다. 정전이다. 3나노미터(nm) 웨이퍼를 섭씨 1,000도 이상으로 굽는 연속 공정은 전력이 한 순간이라도 끊기면 그 배치 전체를 폐기해야 한다. 반도체 제조는 중단이 허용되지 않는 공정이다. 시작했으면 끝까지 간다. 전력이 흔들리는 순간, 수십 일치 작업이 쓰레기로 변한다.

11일의 절벽

2026년 3월 4일, 이란전쟁의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됐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를 “현대 역사상 가장 심각한 에너지 공급 충격"으로 규정했다. 세계의 시선은 치솟는 유가와 인플레이션 전망으로 쏠렸다. 그러나 더 조용하고, 더 구조적인 카운트다운이 동시에 시작되고 있었다. 대만에 남은 LNG 비축량. 모건스탠리가 계산한 그 숫자는 11일치였다.

대만은 에너지의 97%를 수입에 의존한다. 이 중 37%는 중동에서 들여오는 액화천연가스(LNG)다. 호르무즈 해협이 닫히면, 이 LNG가 들어오지 않는다. 모건스탠리는 그 상황에서 대만이 버틸 수 있는 비축 기간을 ‘11일의 절벽(11-day LNG cliff)‘이라고 명명했다. 열두 번째 날, 전력망이 흔들린다.

반도체 제조 공정은 전력 불안정을 용납하지 않는다. 웨이퍼 한 배치는 수백 장으로 구성되고, 생산에는 수십 일이 걸린다. 그 기간 동안 단 한 차례의 전압 변동이라도 발생하면 공정 전체가 오염된다. 손실은 배치 폐기로 끝나지 않는다. 오염된 장비를 정비하고, 재가동까지의 공백을 메우고, 고객사에 납기를 재조율하는 연쇄 비용이 따라온다. 첨단 반도체 파운드리에서 정전은 단순한 설비 사고가 아니다. 공급망 전체에 파동을 만드는 사건이다.

에너지 위기와 동시에 소재 충격도 시작됐다. 카타르의 라스 라판 공업단지는 세계 헬륨 공급의 35~40%를 담당하는 시설이다. 이 단지가 이란의 공격을 받아 가동을 멈추면서 헬륨 가격이 두 배로 뛰었다. 헬륨은 반도체 노광 공정에서 필수적인 냉각재다. 공정이 미세해질수록 사용량이 늘어난다. 3nm, 2nm 최첨단 공정이 밀집한 TSMC 팹에서 헬륨 부족은 생산 속도 저하로 직결된다. 대만에는 헬륨 비축량이 없다시피 하다.

에너지와 소재. 두 갈래의 타격이 동시에 대만을 겨냥했다.

하나의 공장이 떠안은 90%

이 위기가 세계를 멈출 수 있다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TSMC가 무엇을 만드는지를 알아야 한다.

대만반도체제조회사(TSMC)는 7nm 이하 첨단 반도체 세계 생산능력의 90% 이상을 단독으로 보유한다.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AMD의 서버 프로세서, 애플의 M시리즈 칩, 퀄컴의 모바일 프로세서가 모두 이 하나의 공장에서 나온다. 2026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가 AI 인프라에 투자하겠다고 공언한 금액은 6,500억 달러(약 880조 원)에 달한다. 이 투자 계획의 대부분은 TSMC가 약속된 일정에 칩을 납품하는 것을 전제로 짜여 있다.

어떻게 이런 구조가 만들어졌을까. 지난 30년 동안 글로벌 산업은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가장 잘 만드는 곳에서 전부 만드는 것이 가장 빠르고 싸다는 논리가 지배했다. TSMC가 기술 격차를 벌리면서 경쟁자들이 하나둘 고급 공정에서 물러났다. 인텔은 자체 파운드리 역량이 뒤처졌고, 삼성은 수율 문제로 주요 고객을 빼앗겼다. 결과적으로 세계 공급망은 단 하나의 공장을 향해 수렴했다. 가장 효율적인 공급망이 가장 취약한 공급망이 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역사에는 비슷한 장면이 있다. 1973년 OPEC이 석유 금수 조치를 발동했을 때, 세계는 처음으로 에너지 안보라는 개념을 배웠다. 중동이라는 단일 공급원에 의존하던 세계는 유가 폭등과 산업 위기를 겪으며 전략 비축유를 쌓고 에너지원을 다양화하기 시작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는 반도체에서 그 교훈을 다시 배우고 있다.

있는 대책, 없는 시간

이 취약성이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은 일찍부터 반도체 공급망 집중을 국가 안보 위협으로 규정하고 대응에 나섰다. 2022년 반도체과학법(CHIPS Act)이 통과됐고, 인텔과 TSMC의 미국 팹 건설이 시작됐다. 그리고 2026년 1월, 미국과 대만은 반도체 공급망 협약을 새로 체결했다. 대만 기업의 직접 투자 2,500억 달러, 미국 내 칩 생산에 대한 신용보증 2,500억 달러. 미국 상무장관은 “대만 반도체 공급망의 40%를 미국으로 이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선언과 현실 사이에는 시간이 있다. 2nm급 파운드리를 미국 땅에서 양산 수준으로 가동하려면 적게 잡아도 5년, 현실적으로는 10년이 필요하다. 장비 제작, 공정 안정화, 숙련 인력 양성이 모두 포함된 기간이다. 반도체 팹은 선언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컨설팅업체 세라프는 이번 호르무즈 위기로 인한 공급망 충격의 완전한 정상화에 5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손실 규모의 추산도 나왔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대만에서 실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첫 1년 안에 세계 GDP의 9.6%, 금액으로는 10조 6,000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계산했다. 미국만 GDP의 6.6%가 줄어든다. 코로나19 충격을 웃도는 수치다. 지금 호르무즈 봉쇄는 분쟁이 아니다. 그러나 구조적 취약성은 분쟁 시나리오와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다.

에너지 안보와 칩 안보는 하나다

이번 위기가 던진 정책 질문은 명확하다. 반도체를 만들려면 전력이 필요하고, 전력을 만들려면 연료가 필요하고, 연료를 얻으려면 해협이 열려 있어야 한다. 에너지 안보와 반도체 안보는 이제 분리해서 설계할 수 없는 하나의 문제다.

한국도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LNG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서 들여온다. 호르무즈 봉쇄가 장기화됐다면 대만만의 위기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과제가 있다. 반도체 공급망 안보 정책에 헬륨, 네온, 크립톤 같은 공정 기체 비축 항목을 추가하는 것이다. 대만이 헬륨 비축 없이 당했던 충격을 한국은 준비로 흡수할 수 있다.

더 큰 질문은 구조다. 전 세계가 TSMC 단일 의존의 위험을 절감하고 대안을 찾는 지금, 한국의 위치를 재검토해야 한다.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TSMC에 이어 세계 2위다. 세계가 두 번째, 세 번째 공급원을 원할 때 그 수요를 흡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 기회를 살리려면 파운드리 수율 안정화와 주요 고객 신뢰 회복이 선결 과제다. 위기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그 투자를 서두를 충분한 이유가 됐다.

대안의 자리를 선점할 시간

투자자와 기업에게 이번 위기는 리스크 재산정의 계기다. TSMC 단일 의존이 계량 가능한 공급망 리스크로 현실화된 이상, 그 위험을 반영하지 않은 조달 전략과 투자 포트폴리오는 이미 낡은 것이다.

한국 기업들의 위치를 냉정하게 보면 기회와 과제가 함께 보인다. SK하이닉스는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 점유율 50%를 유지하며 AI 반도체 시대의 핵심 메모리 공급자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메모리는 TSMC 위기의 직접 대안이 아니다.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첨단 로직 칩, 즉 파운드리 역량에서 세계의 대안 수요가 집중될 것이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3nm 공정이 수율 안정화에 성공하고, 고객사들이 이원화 전략을 현실화하기 시작하면 그 흐름의 최대 수혜자는 한국이 될 수 있다. 준비된 기업이 다음 반도체 지도를 다시 그린다.

절벽이 끝나도 구조는 남는다

호르무즈 봉쇄는 결국 끝날 것이다. 미-이란 협상이 진행되면서 한국 증시에서도 해협 재개통 기대가 코스피를 밀어올리고 있다. 위기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잊는다.

그러나 11일치 LNG와 90%의 단일 공장이라는 구조는 해협이 열려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번 위기는 에너지 충격과 칩 충격이 동시에 연쇄될 수 있다는 경고다. 30년 동안 효율을 위해 쌓아온 취약성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빠르게 터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한국에 남은 질문은 하나다. 세계가 단일 공급원에서 벗어나려 할 때, 한국은 그 대안의 자리에 설 준비가 돼 있는가. 세계가 11일의 절벽에서 배운 교훈을 한국 반도체 산업이 기회로 삼을 시간이 지금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