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BS는 폐지됐다. 그러나 제도가 사라졌다고 해서, 목표를 위에서 받고 동력을 분배에서 구하던 사고의 기본값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는, 아직 구체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채 우리 앞에 열린 물음으로 남아 있다. 이 글은 그 자리에 놓을 하나의 가설을 제안한다 — 평판과 미션과 학습이 결과로 쌓여 스스로 동력이 되는 순환을.
PBS라는 운영체제
PBS 폐지는 하나의 사건처럼 보도되었지만, 사건이 아니라 증상이다. 한 시대의 운영체제가 전제했던 세계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PBS는 산업화 시대 추격형 R&D의 합리적 운영체제였다. 추격에는 결정적 이점이 하나 있었다 — 목표가 이미 바깥에 있었다는 것. 앞서간 나라들이 무엇을 향해 가는지 가리켜 주었으므로, 우리는 그 목표를 위에서 정해 아래로 내려보낼 수 있었고, 정해진 목표에 사람을 배정하기 위해 예산이라는 지렛대를 쓸 수 있었다. 목표를 밖에서 받고, 동력을 분배에서 구하고, 결과를 정해진 답과 대조해 검증하는 일 — 이것이 PBS라는 운영체제의 세 기둥이었다. 추격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 체제는 정확히 작동했다.
문제는 제도 자체가 아니라, 이 운영체제가 딛고 선 전제가 무너졌다는 데 있다. 같은 시리즈의 앞선 글에서 나는 12년을 답 외우기로 직렬 분리한 교육을 ‘폭포수 모델’이라 불렀다. R&D의 PBS도 같은 폭포수다 — 목표를 위에서 흘려보내고, 배정으로 실행하고, 검증으로 닫는 일방향의 흐름. 폭포수가 정당했던 것은 강물이 흘러갈 방향이 미리 정해져 있을 때뿐이다. 그 방향이 사라지면, 폭포수는 그저 통제일 뿐이다.

목표가 밖에 없는 시대
선도형 R&D는 추격형과 결정적으로 다른 조건에서 출발한다 — 목표가 밖에 없다는 것. 추격기에는 앞서간 나라가 도달한 표준이 있었고, 우리는 그 표준을 좌표 삼아 따라가면 됐다. 그러나 자율주행이나 생성형 인공지능처럼 누구도 가본 적 없는 영역에서는, 따라갈 표준 자체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지를 가리켜 줄 앞선 자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선도란 단지 더 빨리 달리는 일이 아니라, 목표와 동력을 바깥에서 받는 대신 안에서 만들어 내는 능력의 문제가 된다.
이 전환은 R&D의 형태도 바꾼다. 추격기에는 요소기술을 먼저 축적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통합하는 방식 — 기술을 밀어 올리는(push) 방식 — 이 유효했다. 무엇이 필요한지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표가 미정인 선도기에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현장에서 부딪쳐 끌어내야(pull) 한다. 그 끌어냄이 일어나는 연구의 양식이 융합연구다. 서로 다른 기술과 현장이 한자리에서 부딪치는 일 — 그 부딪침이 곧 실증이며, 따라서 융합연구는 그 자체로 실증하는 연구다. 융합연구는 결과를 확인하는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연구의 한 갈래다.
다만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융합연구는 기초·핵심·원천 연구보다 우월하거나 그것들을 대체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둘은 우열을 다투는 사이가 아니라, 애초에 하는 일의 종류가 다르다. 기초·핵심·원천 연구는 기술의 깊이와 역량 자체를 끌어올리는, 말하자면 ‘수준을 높이는’ 연구다. 반면 융합연구는 그 역량이 어떤 수요와 만나야 하는지를 다루는, ‘수요를 발견하고 채우는’ 연구다. 두 축은 경쟁하지 않고 직교(直交)한다.
그리고 수요를 다루는 융합연구 안에는 다시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이미 기술도 충분하고 수요도 분명한 곳에서 그 필요를 채우는 연구 — 말하자면 ‘현재의 수요’를 다루는 융합연구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구성할 요소기술조차 아직 없는 미래를 향해, 수요 자체를 발견하고 만들어 가는 도전적 융합연구 — ‘미래의 수요’를 다루는 연구다.
없던 것은 장(場)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평판도, 자기조직화도, 설계의 경쟁도 — 어느 것 하나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이렇게 하지 못했는가.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날 ‘장(場)‘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수요가 어디에 있는지, 누가 무엇을 시도해 실패했는지 — 이 정보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에게 닿을 곳이 없었다. 추격기에는 그 자리를 예산 배분 행정이 대신했고, 그 밖에 다른 장은 마련되지 않았다.
그 장에는 더 보편적인 이름이 있다 — 시장이다. 우리는 시장을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시장은 자연이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발명한 것이다. 이 글에서 ‘플랫폼’이라 불러 온 것의 보편적 이름이 바로 이 시장이다.
시장의 본질은 거래가 아니라 정보다. 흩어져 서로에게 닿지 못하던 정보 — 무엇이 얼마나 귀한지, 누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이 어디에 필요한지 — 를 한자리에 모아 보이게 함으로써, 시장은 정보의 결핍을 메운다. PBS는 그 정보를 중앙이 모두 알 수 있다고 가정한 체제였다. 그러나 흩어진 정보는 본래 중앙에 다 모이지 않는다. 그 가정이 무너진 자리에 필요한 것은, 더 똑똑한 중앙이 아니라 정보가 스스로 흐르는 시장이다.
다만 이것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는 ‘무엇을 연구하라’를 정하지 않는다 — 그것은 흩어진 현장이 도출할 몫이다. 국가가 하는 일은 그 정보가 흐르고 경쟁이 일어날 장을 발명하고, 그 규칙을 설계하는 것이다. 새로운 운영체제란 계획을 버리고 시장에 투항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시장을 설계하는 일이다.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는가
목표와 동력을 안에서 만들어야 한다면, 가장 먼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이 연구자를 움직이는가’이다. PBS의 답은 명료했다 — 예산이다. 그러나 분배는 사람을 특정 과제로 밀어 넣을 수는 있어도, 가본 적 없는 길로 스스로 나아가게 만들지는 못한다.
연구자를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평판(reputation)이다. 그리고 평판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진다. 하나는 동력으로서의 얼굴이다 — 평판은 연구자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 분야를 찾아 파고들게 만드는 안쪽의 추동력이다. 다른 하나는 수단으로서의 얼굴이다 — 평판은 ‘누가 이 분야의 전문가인가’를 가시화함으로써, 흩어져 있던 전문가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융합연구 그룹으로 스스로 묶이게 하는 좌표계가 된다.
평판은 목적이 아니다 — 일의 결과로 쌓이는 것이며, 결과로 쌓이기에 비로소 다음 일의 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평판은 어디서 오는가. 플랫폼 안에서 이루어지는 협업과 토론과 기록은 물론, 플랫폼 밖에서 이루어지는 논문과 발표와 현장의 인정까지 — 연구자가 남기는 모든 자취가 평판의 재료가 된다. 인공지능은 이 모든 자취를 볼 수 있게 펼쳐 보일 뿐, 누가 더 우수한지 순위를 매기지 않는다. 평가는 끝까지 사람의 몫이다.

문제는 어떻게 미션이 되는가
목표가 밖에 없다면, 미션은 어디서 오는가. PBS의 운영체제에서 미션은 위에서 선언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도의 미션은 선언될 수 없다 — 아무도 미래를 미리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전적 융합연구가 특별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것은 주어진 미션을 실행하는 연구가 아니라, 미션이 무엇인지를 발견해 가야 하는 연구다.
문제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미 차고 넘친다. 다만 현장 곳곳에 흩어진 채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미션은 이 흩어진 문제들이 약한 연결을 통해 모이고 겹쳐질 때 비로소 그 윤곽을 드러낸다. 미션은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도출되는 것이며, 그 도출의 과정이 바로 도전적 융합연구다.
PBS가 하나의 정답을 위에서 고르는 단일해(單一解)의 체제였다면, 이것은 여러 설계가 나란히 경쟁하도록 두는 다중해(多重解)의 체제다. 미래의 답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도출이 일어나는 장 또한 플랫폼이다. 인공지능은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던 문제들 사이의 약한 연결을 드러내 보여줄 뿐이며, 그 연결을 미션으로 확정하는 일은 전문가들의 숙의에 맡긴다.
융합연구는 검증이 아니라 학습이다
미션이 도출되면 융합연구가 시작된다. 그러나 융합연구는 ‘되는지 안 되는지를 확인하는 검증’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기술과 현장이 부딪치며 배우는 학습의 엔진이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의 실패는 끝이 아니라 신호다 — 무엇이 빠졌는지, 어디가 막혔는지를 알려 주는 정보인 것이다.
기초·핵심·원천 연구는 호기심을 따라 아무도 묻지 않은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이 무르익어 새로운 가능성의 씨앗이 된다. 융합연구는 그 씨앗을 현장으로 끌어와 길을 낸다. 특히 도전적 융합연구는, 길을 내다 요소기술의 부재라는 벽에 부딪치고, 그 벽을 다시 기초·핵심·원천 연구의 새로운 물음으로 되돌려 준다. 역량이 던진 씨앗을 수요가 길어 올리고, 수요가 부딪친 벽이 다시 역량의 물음이 되는 — 서로에게 물을 보내는 두 개의 펌프인 것이다.
문제에서 미션으로, 미션에서 융합연구로, 융합연구에서 학습으로, 학습에서 평판으로, 평판에서 다시 새로운 문제로 — 이 여섯 마디가 맞물려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는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 이 순환은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이 아니다. 한 회차가 끝날 때마다 평판이 더 두텁게 쌓이고, 다음 미션의 도출은 더 빨라진다. 원이 아니라 나선이다.
지금이 그때다
제6차 과학기술기본계획이 PBS 폐지를 공식화하고, 부총리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구 환경"을 약속한 지금이, 그 운영체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드문 창(窓)이다. 제도로서의 PBS를 지우는 일은 이미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깔아 둔 사고의 기본값 — 목표를 밖에서 받고, 동력을 분배에서 구하고, 연구를 정해진 답과 대조하는 검증으로 여기는 — 까지 저절로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진짜 전환은 제도의 폐지가 아니라 운영체제의 교체에서 일어난다.
그 새로운 운영체제에서 인공지능은 끝내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스스로 움직이는 연구자와, 현장에서 도출되는 미션이다. 인공지능은 그 무대가 돌아가게 하는 가장 안쪽의 장치이며, 그것이 하는 일은 결정의 대행이 아니라 시야의 확장이다.
광주의 AX 실증밸리에서 우리는 이 운영체제를 문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돌리고 있다.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달리며 만들어 내는 것은 단지 데이터가 아니라, 무엇을 더 연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들이다. 평판이 전문가를 부르고, 문제가 미션으로 모이고, 융합연구가 다시 기초·원천의 물음을 호명하는 그 순환을, 우리는 매일 조금씩 배워 가는 중이다.
산업화 시대의 운영체제를 벗어난다는 것은, 더 많은 예산을 더 잘 나누는 일이 아니다. 평판과 미션과 학습이 결과로 쌓여 스스로 동력이 되도록, 그 순환이 일어날 조건을 설계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