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방산·조선에서 세계 2위. K-컬처는 전 지구를 흥분시키고, 코스피는 5,000을 넘었다. 그런데 자살률은 OECD 1위, 저출산은 인류 역사의 기록을 경신하고, 지방은 소멸하고 있다. 진영은 갈라졌고, 광장은 뜨겁지만 일상은 차갑다.
6월 10일 오후 2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체칠리아홀. ‘광복100년 국민동행’ 준비위원회가 지난 3월 출범 이후 처음으로 공론의 장을 열었다. 마침 이날은 6·10 만세운동 100주년이었고, 6·10 민주항쟁 39년이 되는 날이다. ‘생명·생태’와 ‘평화·민주주의’를 두 축으로, 생태학자·법철학자·청년 정치인·기후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광복 100주년(2045년)까지 남은 시간은 19년이다.
이번 공론마당에는 정규호 박사(생명학연구회 부회장),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김대중도서관장), 박은정 이화여대 명예교수(법학·전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공동대표, 한윤정 녹색연합 공동대표, 장윤석 녹색연구활동가, 박준규 한반도청년미래포럼 대표 등이 참석해 원로·중견·청년 3세대가 발제와 토론을 주고받는 세대 통합형 방식으로 진행됐다.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이 사회·좌장을 맡아 3시간의 토론을 이끌었다.

‘내파(內破)’ — 안에서 무너지는 사회
정규호 박사(생명학연구회 부회장)가 기조 발제를 열었다. 그는 2045년 광복 100주년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순한 기념의 차원을 넘어서, 모든 생명 존재들이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 지속가능한 삶과 문명을 위한 사회적 약속이자 선언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문을 열었다. 1945년의 광복이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면, 2045년은 ‘무엇을 향한 가치 지향적 문명 건설’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80년 한국 사회의 궤적을 그는 세 단계로 짚었다. 6070년대 “하면 된다"의 개발국가 시대, 8090년대 민주화와 경쟁국가 모델, 그리고 IMF와 금융위기를 거쳐 “지금 고생해도 미래는 보장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구조화된 현재다. 세월호와 코로나를 지나면서 청년들 사이에는 ‘헬조선’, ‘이생망’, ‘N포세대’라는 말이 퍼졌고, 일부 청년층의 극우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위기를 그는 ‘내파(內破)‘라는 말로 설명했다. “외부의 힘에 의해 파괴되는 외파보다 안에서 스스로 무너지는 내파가 공동체와 민주주의, 생명의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그 증거로 자살률 통계를 꺼냈다. 인구 10만 명당 2024년 29.1명으로 OECD 평균의 두 배, 처음으로 40대 사망원인 1위까지 자살이 올라섰다는 수치였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26년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도 인용됐다. 응답 전문가의 3분의 2가 10년 후 세계를 ‘격동’ 또는 ‘폭풍’으로 전망하고, 2050년까지 최대 2억 1,600만 명의 기후 이주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수치였다.
위기의 구조적 원인으로 그는 ‘단기적 시간성의 구조화’를 지목했다. 4~5년 주기 선거는 장기 의제를 다루지 못하고, 자본의 분기 실적주의는 지속 불가능성을 심화시키며, 알고리즘 미디어는 숙의를 약화시킨다. 파국이 닥쳐서야 임시방편을 마련하게 되는 ‘지연의 정치(politics of delay)‘라는 것이다. 그가 내놓은 전환의 방향은 ‘살림의 정치’였다. “진보/보수, 좌/우로 나뉘어 서로 적대시하는 기존 정치 모델은 기후 문제를 비롯한 생명·생태 위기에 무감각, 무능력, 무책임성을 드러내고 있다"며, 마을공동체운동·사회연대경제·풀뿌리 주민자치 같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즉 지금 여기서 미래 비전을 미리 실험하는 실천을 제안했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공동대표(녹색불교연구소 소장)는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을 소유 구조에서 찾았다. “모든 소유는 거슬러 올라가면 누군가의 점유에서 시작됩니다. 기후환경문제는 개인 소유 기반의 경쟁 시스템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지·물·대기·에너지 등 뭇 생명의 공통 자산을 자본과 인간이 독점·사유화한 것이 기후위기와 대멸종의 근본 원인이라는 진단이었다. 2045년을 향한 사회적 약속에 ‘지구 공유지(Global Commons) 회복’ 원칙이 명시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구체적인 정책 제안도 이어졌다. 청년 세대의 수저계급론과 자산 격차 이면에는 독점적 사적 상속 제도가 있다며 ‘사회적 상속 제도’와 ‘청년기초자산제’ 도입을 제안했다. 영국 사례를 참고한 ‘마음행복부’ 신설, 그리고 입법·사법·행정에 이어 비인간 존재와 미래세대를 대변하는 제4의 독립기구로서 ‘미래심의위원회’ 설치도 촉구했다. “지금의 정치는 현재 인간의 욕망만을 반영합니다. 자연과 미래세대를 심의하는 기구 없이는 환경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한윤정 녹색연합 공동대표(한신대 교수)는 기후 문제의 정치 편향을 경계했다. “기후 생태 운동이 진보와 동일시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기후 문제는 천지개벽의 문제, 문명 전환의 문제입니다.” 그는 복수의 시간들이 충돌하는 현실도 짚었다. “지질학적·생물학적·역사적·기술적·정치적 시간과 기후 시간, 디지털 시간 등이 공존하며 충돌한다"는 것이 기후 정치를 근본적으로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SF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도 빌렸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
자리를 긴장시키는 숫자 하나를 꺼낸 것은 장윤석 녹색연구활동가였다. “코스피가 8,000이라는 건 모두 압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아십니까. 350ppm을 넘으면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째서 423이라는 숫자를 코스피보다 더 강력하게 느끼지 못하는 걸까요.” 1998년 IMF 위기의 해에 태어난 그는, 지금 이 자리가 골든타임이라고 했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의 말, 생태 사상가 김종철 선생이 평생 품으셨던 문장을 인용했다.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 있을 뿐입니다.”

코리안 미스터리 — 성공과 파국이 동시에 가능한 나라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김대중도서관장)가 이 모순을 하나의 단어로 압축했다. “한쪽은 코리안 미라클, 한쪽은 코리안 디자스터라고 한다. 저는 이것을 코리안 미스터리라 부릅니다.”
그는 현재를 “인류 역사에서 매우 드문 국면"으로 진단했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면 평화가 구제 역할을 했습니다. 평화가 위기에 빠지면 공화주의가 이를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주의와 평화가 동시에 위기입니다.” 세계화·자유화·민주화 30년의 결과가 국내적으로는 전제화·우경화·양극화로, 국제적으로는 탈세계화와 자유주의 국제질서 해체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위기의 주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완전한 승리를 선언하던 바로 그 순간, 그것을 주도해온 미국과 영국이 탈자유주의·탈세계화를 선도하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러시아 민족의 위대한 부흥. 자유·평등·민주주의·평화,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2020년 뮌헨 안보회의의 화두였던 ‘Westlessness(서구가 서구다움을 잃어가고 있다)‘를 박 교수는 다시 소환했다. “인권·민주주의·복지의 기준 역할을 했던 유럽의 역할이 상실되고 있습니다.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존한 유럽은 미중 경쟁에 끼어들 틈조차 없습니다.”
한국의 역설도 정면으로 응시했다. “스칸디나비아 3국을 합쳐도 우리 무역량을 넘기 어렵습니다. 방산과 조선은 사실상 세계 2위 수준입니다. 반도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상 제국입니다. 그런데 사회갈등지수는 늘 5위권 안에 들고, 자살률과 저출산 수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방소멸 속도를 보십시오. 이것이 모두 민주주의 아래서 일어났습니다.”
‘진영화’가 미래를 잠식한다 — Futuricide와 Democide
핵심 병인으로 박명림 교수는 ‘진영화’를 꼽았다. “탈진영적 공화 의제, 공동 의제를 어느 진영이 먼저 선취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집니다. 청년들이 죽어나가도, 저출산으로 미래가 학살돼도 표가 안 되니 가지 않습니다. 진영 의제에만 자원이 집중됩니다.” 이를 그는 ‘Genecide(세대학살)’, ‘Futuricide(미래학살)’, ‘Democide(민주주의 자살)‘에 빗댔다.
헌법 개정 논의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했다. “합의가 안 됐는데 합의했다고 밀어붙입니다. 헌법은 나라를 함께 만드는 법입니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 박정희의 유신, 그때도 다 명분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주공화’로의 전환을 제안했다. “권위주의 40년, 민주주의 40년. 이제는 민주공화국 40년으로 바꿔야 합니다. 공화 가치가 커지면 내부의 연립·연합이 가능해지고, 그것이 남북 평화로도 이어집니다.”
박은정 이화여대 명예교수(법철학·전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는 지금의 대의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는 과두제에 가깝다고 짚었다. “선거에서의 대표성 왜곡, 새로운 정치세력의 진입을 차단하는 정당 구조, 사법부와 국회에 비해 비대한 대통령 권한, 국민 참여가 제한된 법률 발안. 이런 구조에서 포용과 협치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개헌의 지향점이 분명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5·18 정신을 헌법에 담고, 계엄 요건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위한 개헌은 너무 느슨한 생각입니다. 분권과 협치. 이것이 헌정 개혁의 목표여야 합니다.”
독일의 최근 선거도 소환됐다. 극우정당이 30%를 넘어 1위를 차지했지만 고용·치안·이민 등 객관적 지표는 나빠지지 않았거나 오히려 회복됐다. 국민들은 현실보다 체감적 위협과 불안, 기성정치에 대한 신뢰 고갈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청년의 고독, 뒤틀린 연결
박준규 한반도청년미래포럼 대표는 청년 세대의 극우화 현상을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고독의 문제로 읽었다. “정치적 양극화만큼 깊은 것은 청년 세대의 고독입니다.” SNS로 연결된 세대가 가장 깊은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는 역설이다.
“자신을 이해해 줄 공동체를 갈 길 잃은 사람처럼 찾아 헤매기 때문이 아닐까요. 고독할수록 극단적인 것을 찾게 됩니다. 온라인의 혐오와 냉소 문화도 연결되지 못한 세대의 외로움이 뒤틀린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박명림이 코리안 미스터리를 구조의 언어로 진단했다면, 박준규는 그것을 사람의 언어로 번역했다. 제도의 실패가 관계의 실패로, 관계의 실패가 다시 정치의 실패로 순환한다.
세대 간 대화의 방식도 바꿔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통일 찬성이냐 반대냐를 묻는 여론조사로는 청년들의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미래를 상상할 수 있어야, 안정감이 있어야, 공동체 일원이라는 감각이 있어야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번 지방선거 현장을 누볐던 청년 정치인 이중민은 거대 양당 구조의 질식감을 격앙된 목소리로 전했다. “나는 내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정치에 발을 들이면 정당의 목소리만 낼 수밖에 없습니다. 다양한 정치가 나와야 하는데 소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좁습니다.” 그는 지방의회의 존재 이유를 되물었다. “가장 가까운 곳의 정치가 살아야 합니다.”
공통장을 먼저 만드는 것 — 2045년을 향한 동행
마무리 발언에서 박명림 교수는 해법의 실마리를 ‘동행’이라는 어원에서 풀었다. “의회를 뜻하는 콩그레스(Congress)는 함께 걷는다는 뜻입니다. 하우스 오브 커먼스는 귀족과 평민의 동행에서 출발했습니다. 커먼센스, 커먼웰스, 커먼로. 공통감각, 공통자산, 공통법. 헌법을 만드는 자리도, 그 이름도 결국 동행입니다. 공통장을 먼저 만들고, 그것을 대변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 의회입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공통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토론 진행을 맡은 김태일 교수(전 장안대 총장)는 두 세션의 발언을 나란히 놓으며 이렇게 정리했다. “박명림 선생님은 공화·연합·타협을, 박은정 선생님은 시민·공론·생활민주주의를, 박준규 선생님은 신뢰·공감·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국민동행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리고 장윤석 활동가가 던진 말이 다시 언급되었다. “지금 세대 간 대화를 나누는 이 자리가 골든타임입니다. 앞으로의 향방을 가르는 시간입니다.”
이번 제1차 공론마당에서 도출된 발언과 논의는 ‘1차 공론 결과문’으로 정리되어, 오는 7월 10일(금) 개최 예정인 제2차 공론마당(‘기술·경제·노동’ 및 ‘교육·세대·젠더’ 주제)의 토론 자료로 이어진다. 두 차례 공론마당의 논의를 바탕으로 ‘광복100년 국민동행 선언문’은 광복절 전날인 8월 14일(금) 공식 창립대회에서 발표되며, 이날 ‘2045년 세계와 동행하는 대한민국’을 위한 국민동행 운동의 공식 출범이 대내외에 선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