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결 시대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에델만이 28개국 34,000명을 조사한 2026 Trust Barometer에서 신뢰는 팽창이 아니라 수축하고 있다. 연결이 많아질수록 신뢰할 수 있는 원의 크기는 오히려 좁아지고 있다. 2002년의 기업 CEO 불신, 2012년의 정부 불신, 2023년의 양극화를 거쳐, 2026년은 고립의 해가 됐다.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표준’이 된 세계
에델만은 2025년 10~11월 28개국 34,000명을 조사해 올해 1월 결과를 발표했다. 핵심 수치는 하나로 압축된다. 전 세계 응답자의 70%가 자신과 다른 가치관, 다른 배경, 다른 정보 출처를 가진 사람을 신뢰하지 않거나 신뢰하기를 꺼린다고 답했다.
에델만 CEO 리처드 에델만은 이것을 “제한된 세계관을 강제하는 폐쇄적 신뢰 생태계(a closed ecosystem of trust that mandates a limited worldview)“라 불렀다. 낯선 것을 차단하고 동질한 집단 안으로 철수하는 현상이다. 보고서는 2025년의 테마가 “분노(grievance)“였다면 2026년의 테마는 “고립(insularity)“이라 명명했다.
이 고립 경향은 선진국에서 더 두드러진다. 일본이 90%로 가장 높고 독일 81%, 영국 76%, 미국 70%다. 역설은 뚜렷하다. 가장 많이 연결된 사회들이 가장 좁은 신뢰 반경을 갖게 됐다.
한국 신뢰지수 46점 — 분열은 세대 사이로 내려왔다
에델만 신뢰지수에서 한국은 46점이다. 100점 만점에 절반도 못 미친다. 선진국 기준으로는 일본(38점) 다음이지만, 중국(80점), 인도(74점), 인도네시아(73점)와 비교하면 극적인 대비다. 신뢰가 낮은 곳에서 사람들은 더 좁은 원 안으로 후퇴한다. 에델만이 확인한 한국의 패턴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인은 자국 기업을 외국 기업보다 28포인트 더 신뢰한다. APAC 내에서 일본(29포인트)에 이어 두 번째로 강한 내부 집단 편향이다. ‘한국 기업이기 때문에’ 신뢰하는 구조에서는 기업의 실질 역량이나 윤리보다 소속감이 신뢰를 결정한다.
고립은 세대 사이로도 내려왔다. 한국리서치의 2026 세대인식조사에 따르면 세대갈등의 원인 1위는 ‘가치관 차이’로 응답자의 51%가 꼽았다. 경제적 불안정(45%)보다 높다. 18~29세 응답자의 91%가 60대 이상과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 답했다. 중앙대학교 신진욱 교수는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가 마치 세대 간 문제인 것처럼 치환됐다"고 지적한다. 경제 구조의 균열이 가치관 갈등으로 번역되면서, 사람들은 경제가 아닌 세대를 탓하게 됐다.
한국행정연구원의 2025년 사회통합실태조사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중앙정부와 국회는 지속적으로 기관 신뢰 최하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청렴성 인식이 정부 신뢰를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변수(표준화 계수 β=0.417)인데, 그 청렴성 인식 자체가 낮다.

고립을 만든 네 가지 압력 — 구조가 심리를 바꿨다
에델만은 고립 마음가짐이 확산한 원인으로 네 가지를 지목한다.
경제 불안이 첫 번째다. 직원의 3분의 2가 관세와 무역 정책이 자신의 고용주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 우려한다. AI 공포도 숫자로 나타난다. 저소득층의 54%, 중산층의 44%가 생성형 AI로 인해 경쟁에서 낙오될 것이라 예상한다.
낙관론 소멸이 세 번째다. 다음 세대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비율이 전 세계 평균 32%인데, 프랑스는 6%, 독일은 8%, 미국은 21%로 9포인트나 하락했다. 마지막으로 정보 환경의 혼탁이다. 외국 세력의 허위정보 개입을 우려하는 비율이 아시아태평양 6개국에서 두 자릿수로 급증했다.
이 네 가지는 단순한 심리적 불안이 아니다. 에델만 보고서는 면역 시스템의 비유를 쓴다. 외부 위협을 차단하려는 자기보호 본능이 과도해지면 사회 결합력 자체를 침식한다. 자가면역질환처럼, 보호하려는 본능이 오히려 내부를 공격한다. 이 고립이 깊어질수록 소득 격차에 따른 신뢰 불평등도 커진다. APAC 기준으로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신뢰 격차는 2012년 7포인트에서 2026년 16포인트로 두 배 이상 벌어졌다.
정부가 비운 자리, 기업에게 청구서가 왔다
신뢰 위기에서 순위가 뒤집혔다. 기관 신뢰 순위에서 ‘나의 고용주’가 78%로 1위다. 기업 일반(64%)보다 14포인트, 정부(53%)보다 25포인트 높다. 직장이 신뢰의 마지막 보루가 됐다.
에델만 보고서는 CEO에게 이 역할을 공식 위탁한다. 응답자의 73%가 CEO가 직접 신뢰 중개를 이끌어야 한다고 답했다. 다른 가치관의 직원을 포용(75%)하고 회사를 비판하는 직원도 건설적으로 수용(74%)하는 것이 CEO의 의무로 명시됐다.
그러나 이 구도에는 구조적 부담이 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다. ‘신뢰 복원’이라는 공공재를 민간 기업이 떠안는 것이 지속 가능한가. 고립 마음가짐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과 ‘다르다’고 느끼는 리더가 이끄는 기관을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28~31포인트 덜 신뢰한다. 기업이 신뢰 중개자 역할을 강화할수록 오히려 더 강한 가치관 검열을 받게 되는 역설이다.
고립이 역전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에델만 데이터에는 희망의 단서도 있다. “저소득층이 기관의 신뢰 구축 노력을 제대로 인식할 때 신뢰 점수가 18포인트 상승한다"고 보고서는 밝힌다. 조건이 갖춰지면 고립도 풀릴 수 있다.
그 조건을 에델만 데이터는 역으로 가리킨다. 경제 불안의 완화, AI 이익의 공유, 정보 생태계의 정화, 그리고 정부의 청렴성 회복이다. 이 조건이 채워져야 고립 마음가짐이 역전된다. 단, 어느 것도 단기간에 이루기는 쉽지 않다.
반대 방향의 힘도 있다. 개도국들의 높은 신뢰지수는 경제 성장 낙관론과 맞닿아 있다. 고립이 절정에 달한 선진국들에서도 직장, 지역 의사, 담임 교사 같은 ‘가까운 신뢰 관계’는 건재하다. 필터 버블로 고립을 상품화하는 플랫폼 구조가 가장 큰 역풍이다. 그 방향을 바꿀 규제나 설계 혁신이 얼마나 빠르게 나타나느냐가 향후 고립 트렌드의 분기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 정부 신뢰 회복은 청렴성에서 시작된다
한국행정연구원 분석에서 청렴성 인식은 정부 신뢰를 결정하는 단일 변수 중 가장 강력하다. 반부패 정책, 정보 공개 확대, 내부 고발자 보호가 신뢰 회복의 핵심 경로다.
세대갈등을 가치관 문제로만 접근하면 경제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원인이 가려진다. 신진욱 교수의 지적처럼 ‘세대 내 불평등’이 핵심이다. 청년 주거·고용 지원 정책이 가치관 교육보다 신뢰 회복에 더 직접 닿는다. 허위정보 대응도 시급하다. 정보 혼탁이 고립의 촉진 요인인 만큼,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과 플랫폼 규제를 함께 엮어야 효과가 난다.

신뢰 자산이 새로운 경쟁 우위가 된다
한국 기업에는 자국 기업 신뢰 프리미엄 28포인트가 있다.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할 자산이다. 고립 마음가짐 시대에 브랜드 신뢰는 광고비가 아니라 가치관 일치와 투명성에서 온다.
단, 기업이 거시 정치 이슈에서 신뢰 중개자 역할까지 떠안으면 고립 집단의 더 강한 가치관 검열을 받게 된다. 역할의 범위를 직원-고객 관계에 집중하고 정치적 이슈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 현실적이다. 에델만이 제시하는 CEO 리더십은 정치가 아닌 조직 내 다양성 포용에서 시작된다.
신뢰는 주어지지 않는다 — 설계되는 것이다
에델만 보고서는 25년의 데이터를 쌓아왔다. 2002년 기업 CEO 불신, 2012년 정부 불신, 2023년 양극화, 그리고 2026년 고립. 매 국면마다 신뢰의 위기는 달랐고, 매번 복원의 조건도 달랐다.
지금 세계가 빠져드는 고립은 ‘연결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연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다. 에델만이 포착한 것은 신뢰의 붕괴가 아니라 신뢰의 재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신뢰한다. 단지 더 좁고 더 균질한 원 안에서만.
고립의 반대말은 개방이 아니다. 면역 과잉 반응을 끄는 방법은 무방비 노출이 아니다. 신뢰할 수 있는 안전 경험을 설계하는 것이다. 직장이, 마을이, 작은 공동체가 그 설계의 단위다. 한국 신뢰지수 46점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는 그 설계가 얼마나 진지하게 이루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