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핀란드가 기본소득 실험을 접었을 때, 세계는 실망한 채 각주 처리했다. 고용 효과가 미미했고 재원도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8년 후 영국 장관과 한국 총리가 같은 제안을 꺼냈다. 달라진 것은 하나다. 에이전틱 AI가 등장했다. 근육이 아닌 두뇌를 자동화하는 이 기술은 ‘재훈련하면 된다’는 사회 계약의 근거 자체를 흔들고 있다. 핀란드의 실험은 실패가 아니었다. 시대가 따라오지 못했을 뿐이다.

모두가 실패라 불렀던 실험 — 8년 만에 두 나라 장관이 꺼낸 이유

2018년 12월 31일, 핀란드 정부는 2년간의 기본소득 실험을 예정대로 끝냈다. 결론은 냉정했다. “이 모델의 전면 확대는 어렵다.” 2,000명에게 월 560유로를 2년간 무조건 지급했지만 고용일수 증가는 6일에 그쳤다. 재정 부담도 컸다. 기본소득은 학술 저널의 흥미로운 각주로 돌아가는 듯했다.

2026년 2월 1일, 영국 노동당 정부의 제이슨 스톡우드 경(Lord Jason Stockwood, 투자담당 장관)이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다시 그 단어를 꺼냈다. “AI로 즉각 사라지는 일자리를 위한 일종의 UBI(보편적 기본소득)가 필요하다.” 같은 해 6월 24일, 한국 김민석 국무총리는 하계 다보스포럼 특별연설에서 “AI 전환 성과와 기본소득을 연계하는 실험을 국제사회에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정책적 의무"라고 선언했다.

핀란드 실험 종료로부터 불과 8년이다. 이번엔 무엇이 달라졌는가.

에이전틱 AI — 근육이 아닌 두뇌를 겨누다

달라진 것은 자동화의 표적이다. 핀란드 실험이 진행되던 2017~2018년, AI는 제조업과 단순 반복 업무를 자동화하는 수준이었다. “공장이 사라져도 재훈련하면 된다"는 논리는 그럭저럭 통했다. 새 기술을 배울 도착지가 있었다.

2026년은 다르다. 에이전틱 AI(agentic AI)는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계획을 수립하며, 실행한 뒤 결과를 검증한다. 인간의 개입이 없어도 된다. 법률 문서 검토, 코드 작성, 금융 분석, 의료 영상 판독 — 화이트칼라 지식 노동의 핵심이 자동화 사정권에 들어왔다.

가트너는 2025년 5% 미만에 그쳤던 기업 앱의 에이전틱 AI 통합률이 2026년 말 40%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앤트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CEO는 2025년 초 “향후 몇 년 내 사무직 신입 일자리의 50%가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맥킨지 2026년 보고서는 생성형 AI가 직원 업무 시간의 70%에 해당하는 활동을 자동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산업혁명은 근육 노동을 대체했다. 새 공장이 생겼고, 새 기술을 배우면 됐다. 에이전틱 AI는 인지 노동을 대체한다. 재훈련의 도착지 자체가 자동화되는 상황이다. 영국에서 AI 관련 업종 일자리가 12개월간 8% 순감소했다는 모건스탠리의 수치는, 이것이 전망이 아닌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준다.

핀란드 실험이 진짜 증명한 것 — 고용이 아니라 존엄성

이 지점에서 핀란드 실험의 결론을 다시 읽어야 한다.

고용일수 6일 증가는 정책 실패의 지표였는가. 아니면 애초에 다른 문제에 답하고 있었던 실험인가. 실험 참여자들은 대조군보다 훨씬 건강했다. 우울감, 고독감, 정신적 스트레스가 유의미하게 낮았다. 삶의 만족도와 인지 기능에 대한 자기 인식도 올랐다. 핀란드 정부가 “고용 효과 미미"로 요약하는 동안, 연구자들이 측정한 것은 사실 다른 무언가였다.

노동은 소득만 주지 않는다. 일상의 구조, 사회적 정체성, 타인과의 연결을 함께 준다. 화이트칼라 일자리가 빠르게 소멸할 때의 충격은 소득 손실만이 아니다. 연구자들은 이를 ‘AI 프리캐리아트(AI precariat)‘라 부르기 시작했다 — 소득 충격과 정체성 충격이 동시에 밀려오는 집단이다. 22~25세 AI 노출 직종 종사자들의 고용률이 이미 16% 하락했다는 미국 데이터가 이 현상을 뒷받침한다.

핀란드가 입증한 정신건강 효과는 이중 충격의 완충재가 될 수 있다는 선행 증거다. 기본소득이 ‘노동 대체 수단’이 아닌 ‘존엄성의 방어선’으로 다시 불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런데 이 방어선을 세우는 데는 치명적인 역설이 있다.

UBI를 가장 크게 외치는 사람들이 재원인 로봇세를 가장 꺼린다

기본소득을 가장 열렬히 지지하는 이들은 엘론 머스크, 샘 알트만 같은 빅테크 CEO들이다. 동시에 UBI 재원으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원천은 이 기업들에 부과하는 AI세(로봇세)다. “AI로 얻는 생산성 이익이 자본과 기술을 가진 소수에게만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스톡우드 경 본인이었다.

그러나 영국 재정연구소(IFS)는 완전 보편적 UBI 모델이 “극히 고비용"이라며, 부가가치세나 국민보험료의 대폭 인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경고했다. 로봇세만으로 재원을 충당하려면 세율을 현실화해야 하는데, 그 세율을 부담하는 기업들이 제도 설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다.

스탠퍼드 기본소득연구소에 따르면 미국 내 UBI 파일럿 프로그램은 163건이며 이 중 41건이 현재 진행 중이다. IMF는 AI가 전 세계 일자리의 40%(선진국 60%)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분석하면서 “이익이 소수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책 어젠다는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재원 구조는 아직 불투명하다.

한국의 움직임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2026년 2월부터 농어촌 기본소득이 전국 처음으로 시행됐다. 김민석 총리의 다보스 선언은 이를 AI 정책과 연계하겠다는 신호다. 재원 구조와 지급 수준, 보편성 범위는 아직 설계 단계다. 실험이 어떤 지표로 설계되는지가 이 신호의 실질을 결정할 것이다.

️ 정책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충돌 이후 수습만 남는다

기본소득 논의는 복지 철학에서 노동시장 긴급 대응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한국이 실질적 선택지를 갖추려면 농어촌 모델 확대 설계와 AI세 입법 논의를 함께 가져가야 한다. ‘재훈련 우선’ 논리는 에이전틱 AI가 인지 노동까지 자동화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 선언만으로는 정책 창이 열렸다가 닫힌다.

‍ 직업 훈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세대가 온다2026년 이후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세대는 ‘재훈련하면 된다’는 경로가 흔들리는 환경을 마주한다. 기본소득이 충분한 수준으로 보장된다면 창업·재교육·자기 탐색을 위한 쿠션이 된다. 그러나 생존 수준의 소액 지급에 그친다면 안전망이 아니라 체념의 조건이 된다. 얼마를, 어떻게 지급하는가가 제도의 방향을 가른다.설계가 늦으면 충돌 후에 에어백을 찾게 된다

닉슨 대통령의 음(-)의 소득세 구상은 1970년대 미 의회에서 부결됐다. 그 아이디어는 30년을 돌아 근로장려세제(EITC)로 변형됐고, 지금 미국 최대의 빈곤 완화 프로그램이 됐다. 실패한 정책 아이디어도 시대의 조건이 바뀌면 새로운 형태로 돌아온다. 핀란드의 실험이 그런 선례가 될 수 있다.

2018년 핀란드 실험은 고용 효과를 증명하지 못했지만 존엄성 효과를 증명했다. 에이전틱 AI가 인지 노동까지 자동화하는 지금, 그 증명의 무게가 달라졌다. 기본소득 논의의 진짜 분기점은 금액이나 재원이 아니다. “일하지 않아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사회가 공식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영국 장관의 인터뷰와 한국 총리의 다보스 선언은 그 명제가 이미 정치의 언어로 번역됐음을 보여준다.

에어백은 충돌 전에 장착해야 한다. 에이전틱 AI라는 트럭이 이미 차선을 바꾸고 있다. 설계를 서두르지 않으면 충돌 후에 에어백을 찾는 나라가 생긴다. 그 나라가 어디가 될지는, 지금 결정되고 있다.

생각해볼 질문

당신의 일 가운데 에이전틱 AI가 대신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나 되는가. 30%인지, 70%인지 가늠해본 적이 있는가. 그 비율이 높다면, 지금 가진 직업이 5년 후에도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만약 매달 기본 생활을 유지할 만큼의 소득이 조건 없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겠는가. 핀란드 실험에서 참여자들은 계속 일했다. 그러나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달라졌을 수 있다. 당신에게 노동은 생존 수단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AI 개발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기업들이 기본소득 재원을 분담하는 것이 공정한가. 그 세금이 제품 가격에 전가된다면, 결국 소비자가 부담하는 셈이 된다. 기술 혜택의 이익과 비용을 사회가 어떻게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주목해야 할 것들

핀란드형 실험이 AI 시대 버전으로 재설계될 가능성. 2017년 실험은 실직자 2,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AI 대체 위험에 노출된 화이트칼라 직종으로 대상을 확대하고 정신건강뿐 아니라 재교육 참여율·창업률을 측정 지표로 추가한다면 완전히 다른 실험이 된다. 한국의 AI-기본소득 연계 실험이 이 설계를 채택하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 로봇세 입법 여부가 UBI 실현 가능성의 핵심 분기점. 영국이 windfall levy를 실제 법안으로 연결하면 국제 규범 형성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선언에 그친다면, 이 논의는 다음 선거 주기에 다시 잠든다. 한국의 조세 논의 병행 여부도 같은 맥락에서 주시해야 한다.

IMF·OECD의 권고 수위 변화. 두 기관은 현재 UBI를 ‘검토 가능한 정책 옵션’으로 다루고 있다. 그 권고가 ‘적극 권고’로 격상되는 시점은 AI 대체 일자리 수치가 임계값을 넘었을 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기관들의 연례 보고서 프레이밍 변화를 추적해야 한다.

연결 이슈 — 로봇세와 AI 과세 국제 규범. 디지털세 논의(OECD BEPS 2.0 필라2)가 AI세 논의와 합류하는 흐름이 생기고 있다. 국경을 초월하는 AI 서비스에 어떤 세금을 어느 나라가 걷는가는 기본소득 재원 문제와 직결된다. AI 거버넌스 논의와 복지 논의의 교차점을 주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