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왜 지식이 흔해진 시대에도 여전히 지식의 전달을 자신의 본업으로 여기는가. 지식의 접근 비용은 0에 수렴했지만 대학은 여전히 지식의 적재를 가르치고, 정작 사회가 요구하는 경험은 졸업장 너머에서 누구도 입혀 주지 않는다. 미래 대학의 핵심은 ‘지식을 얼마나 전달하는가’가 아니라 ‘경험을 얼마나 쌓게 하는가’ — 곧 지식과 경험을 함께 빚는, 프로젝트가 운영체제인 기관으로의 이동일 가능성이 크다.

졸업했는데, 경력이 없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이유를 물으면 답은 한결같다 — “경력이 없어서.” 그런데 이 말에는 오래된 모순이 숨어 있다. 경력은 일을 해야 생기는데, 일자리는 경력을 요구한다. 갓 졸업한 사람에게 경력이 있을 리 없다.

산업화 시대에는 이 모순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가 신입을 받아 일을 가르치며 경력을 입혔기 때문이다. 대학은 지식을, 회사는 경험을 — 그 분업이 매끄럽게 작동하는 한 졸업과 취업 사이에 틈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틈이 벌어지고 있다. 무경력 신입의 곤경은 청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된 운영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첫 번째 신호다.

산업화의 문법 — 지식은 대학에서, 경험은 회사에서

이 분업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운영체제였다. 대학은 지식을 가득 적재한 사람을 출하하고, 회사는 그를 받아 현장에서 경험을 입혔다. 입사 후의 현장 훈련(OJT)이 바로 그 경험의 통로였다. 지식은 대학에서, 경험은 회사에서 — 이것이 산업화 시대가 발명한 문법이다.

이 운영체제가 작동하던 데에는 조건이 있었다. 지식이 희소했다는 것이다. 책과 전문가와 실험실이 비쌌기에 그것들을 한곳에 모아 배급하는 기관이 필요했고, 그 기관이 대학이었다. 반대로 일머리는 글로 옮길 수 없어 현장이 맡았다. 각자 잘하는 것을 나눠 맡은, 효율적인 분업. 우리는 그 문법을 너무 오래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그것이 특정 시대의 산물이라는 사실조차 잊었다.

분업이 양쪽에서 무너진다

그런데 이 분업 프로토콜이 양쪽에서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

발신측이 무너진다. AI가 지식의 비축을 흔하게 만들었다. 머릿속에 쌓아 둔 지식의 값이 떨어졌다 — 누구나 즉석에서 끌어올 수 있으니까. 지식을 가득 적재한 졸업생, 산업화 대학의 완성품이 저가품이 되었다.

수신측도 무너진다. 회사가 더 이상 경험을 입히지 않는다. 짧아진 근속과 경력직 선호로 신입을 길게 키우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AI가 입직 초년의 루틴 업무 — 전통적으로 경험을 쌓던 맨 아래 사다리 — 를 자동화했다. 경험의 온램프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전달의 길마저 흔들린다. 강의는 이미 전 지구로 풀렸고 무료가 되고 있다. 전달이 더 이상 대학만의 독점재가 아니다. 학위의 신호값도 부식된다 — 어느 투자자가 대학에 가지 않는 청년에게 거액의 장학금을 쥐여 주며 “대학은 따져보지도 않고 가는 기본값이 되었다"고 말하는 풍경은, 그 부식의 사회적 표지다.

그래서 무경력 신입은 그 사이에 낀다. 대학은 원래 자기 일이 아니어서 경험을 주지 않았고, 회사는 이제 경험을 입히지 않는다. 졸업했는데 경력이 없어 취직이 안 되는 것은 게으른 청년의 문제가 아니라, 분업 프로토콜이 붕괴한 구조의 증상이다.

희소해진 것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다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지식이 무가치해진 것이 아니라, 가치의 무게중심이 지식에서 경험으로 옮겨갔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 왜 경험은 AI가 가져가지 못하는가.

첫째, 경험은 질문의 산출물이다. AI는 답을 외부화했지만 질문은 외부화하지 못한다. 경험은 좋은 질문을 던지고, 부딪치고, 그 결과로 판단이 쌓이는 순환의 침전물이다. 질문이 외부화될 수 없으므로, 질문에서 태어나는 경험도 외부화되지 않는다.

둘째, 경험은 주도적 작업의 산물이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일을 AI에게 맡기면 경험은 AI에게 쌓인다 —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경험은 위임하는 순간 위임받은 쪽에 생기는, 양도할 수 없는 자산이다.

지식은 옮길 수 있는 산물이지만,

경험은 본인이 질문하고 주도해야만 생기는 과정이다.

위임하면, 위임받은 쪽에 쌓인다.

그래서 역설이 성립한다. AI에게 맡길수록 경험은 더 희소해진다. AI가 늘수록 경험은 더 귀해지는데, 정작 경험을 쌓을 자리는 양쪽에서 줄어든다. 그 공백을 메울 기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학이어야 하지 않을까.

프로젝트가 운영체제인 대학

처방은 분명하다. 대학이 지식과 함께 경험을 쌓는 곳 — 프로젝트가 기본 단위인 기관 — 이 되는 것이다.

“프로젝트라면 이미 있지 않은가"라는 반문이 나온다. 캡스톤, 산학협력, 인턴십. 맞다. 그리고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증거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대학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운영체제 위에 얹은 한 과목으로, 마지막 학년의 변방에 두었을 뿐이다. 패러다임의 언어로 말하면, 이것들은 산발적으로 솟아오른 이상현상(anomaly)이다. 프로젝트 기반 대학이란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옳다고 증명된 그 변방의 것들을 중심으로 옮기는 일이다. 경험이 기본 단위가 되고, 지식은 프로젝트가 부를 때 끌어오는 것이 된다.

이것을 직업훈련소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가장 깊은 경험은 연구의 경험 — 아직 답이 없는 곳에서 묻는 일 — 이고, 그것은 대학 위층 연구실이 늘 해 온 일이다. 산업화 운영체제는 그 경험-엔진을 대학원생과 연구실 구성원, 소수에게만 열어 두었다. 프로젝트 기반 대학은 그 문을 모두에게 여는 것이지, 격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학부생이 후배 연구자가 되는 일이다.

떠나는 길과 바꾸는 길은 다투지 않는다. 어떤 이는 대학을 떠나라 하고, 우리는 대학을 바꾸라 한다. 둘은 반대가 아니라 같은 산을 오르는 다른 길이다. 떠나는 이들이 밖에서 찾는 것 — 직접 만들고, 부딪치고, 판단을 쌓는 경험 — 은 곧 대학이 안으로 들여야 할 그것이다. 우회로가 늘어난다는 것은 정문이 잘못 났다는 신호다. 대학의 답은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떠날 이유가 없도록 문을 다시 내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은 공동체다. 다양한 분야의 우수한 학생과 교수가 한자리에 모여, 여러 프로젝트를 함께 치르며 지식을 경험으로 바꿔 가는 곳. 지식이 경험을 부르고 경험이 다시 새 지식을 부르는 — 지식과 경험이 동반 성장하는 공간이다. 이것이 “왜 하필 대학인가"에 대한 답이다. 지식은 AI가 주고 강의는 전 세계가 무료로 풀어놓지만, 뛰어난 파트너들이 한데 모여 함께 부딪치는 그 밀도만은 화면도 검색도 대신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좋은 대학의 정의도 바뀐다. 가장 많은 책과 석학과 시설을 쌓아 둔 학교가 아니라, 지식이 경험으로 전환되는 일이 가장 탁월하고 효율적으로 일어나는 공동체 — 그것이 좋은 대학이다.

어디서, 그리고 언제까지 — 형태가 풀린다

프로젝트가 운영체제가 되면, 대학의 형태도 따라 풀린다. 두 방향에서다 — 어디서 다니는가, 그리고 언제까지 다니는가.

먼저 공간이다. 경험은 현장의 함수다. 지식은 어디서 배우든 같지만, 경험은 어디서 겪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현장이 같으면 경험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모든 학생을 고정된 한 캠퍼스에 묶어 둔 산업화 대학의 형태 자체가, 경험 기관으로서는 한계다. 캠퍼스는 본래 희소한 지식과 전문가의 집적소였다. 그 희소성이 풀리고(AI), 거리가 더 이상 협력의 장애가 아니게 되면서(초연결), 캠퍼스를 한곳에 고정할 이유도 사라진다. 미네르바처럼 현장을 옮겨 다니거나, 분산된 채 전 지구적 협력으로 현장을 잇는 대학이 가능해진다.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 — 애리조나주립대(ASU)의 온라인 재학생은 2025년 가을 8만 명을 넘어섰다. 다만 이것은 강의를 화면으로 옮긴 줌 수업과 정반대다. 줌 수업이 같은 한 우물을 화면으로 비출 뿐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현장을 다변화하고 잇는 일이다.

다음은 시간이다. 산업화의 대학은 고등학교를 마친 직후 4년을 몰아서 다니고 작별하는 일회성 통과의례였다. 그 뒤로는 현장에서 경험을 쌓으면 그만이었다. 4년치 지식이 평생을 버티고, 한 전공이 한 직업을 끝까지 감당한다는 가정 위에서다. 그러나 지식의 반감기가 짧아지면서 졸업장에는 유통기한이 생겼고, 융합의 시대는 한 우물만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를 쏟아낸다. 두 가정이 동시에 무너진 자리에서, 대학은 통과의례에서 평생의 거점으로 바뀐다 — 한 번 길게가 아니라, 인생 곳곳에서 짧게 여러 번 돌아오는 베이스캠프로. 경험이 기본 단위가 되면, 새로운 경험이 새로운 질문을 부르고, 그 질문이 다시 대학을 부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은 왜 멈춰 있는가

변칙이 이미 이렇게 많은데, 왜 전환은 더딘가. 토마스 쿤은 답을 안다. 변칙은 흩어져 있는 한 패러다임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정상과학은 그것들을 변두리의 예외로 흡수해 버린다 — “캡스톤은 한 과목”, “인턴은 선택”, “산학은 일부 학과 얘기”. 변칙을 변두리에 한 칸씩 배정해 두면 핵심 운영체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전환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변칙이 없어서가 아니라, 통합되지 않아서다.

그리고 생성형 AI가 대못을 박았다. 그것은 두 겹의 못이다 — 지식 비축의 값을 무너뜨려 발신측을, 입직의 온램프를 자동화해 수신측을 동시에 친다. 산발적 변칙으로 흔들리던 운영체제에 양쪽에서 못이 박히자, 이제 예외처리로는 봉합되지 않는다. 흩어진 변칙을 하나의 운영체제로 결정화할 때가 — 패러다임이 바뀔 때가 — 온 것이다.

지금이 그때다

왜 하필 지금인가. 세 가지가 동시에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 된다 — 산출물이 거부당한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지식은 쌓인다 — 들어갈 명분이 사라졌다. 그런데 대학에 가면 빚을 진다 — 값만 그대로다. 명분은 사라졌고, 보상은 없으며, 값은 비싸다. 세 변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이 순간이, 예외로 버텨 온 운영체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임계점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것은 먼 미래의 경고가 아니다. 대학 입학자원은 2021년 43만 명에서 2040년 약 28만 명으로 줄고, 지금의 정원을 그대로 두면 2040년 신입생 충원율은 6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추계가 있다. 지금 대학에 들어선 세대가 그 절벽의 한복판에 서 있다. 인구의 시계는 이미 그 답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끝나는 것은 대학이 아니다. 대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이름이 본래 말하는 바 —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 다양성과 보편의 공간 — 야말로 배움에 가장 적합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융합은 대학이 떠안을 짐이 아니라 대학이 가장 잘하는 일이고, 산업화 시대는 그 다양성을 학과의 칸막이로 가둬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끝나는 것은 대학이 아니라, 대학이 한동안 입고 있던 산업화 시대의 형태 — 고정된 캠퍼스, 한 번의 4년, 전달과 학위 — 다. 본질은 사라지지 않고, 형태는 고정되지 않는다. 대학은 가장 역동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

남은 선택은 둘뿐이다.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거나, 다시 짓거나. 대학을 지식의 창고에서 경험의 현장으로, 정거장에서 살아 있는 베이스캠프로 다시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대학의 위기가 아니라, 대학의 체질을 바꾸는 혁신기다. 지식의 창고를 경험의 공동체로, 정거장을 살아 있는 베이스캠프로 다시 짓는 일 — 그 일을 시작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