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우리는 봉신이 되지 않는다” — 연세대에서 나온 한 문장

2026년 4월 3일,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 서울 연세대 강단에 섰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목표는 두 패권국의 봉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지배력에도, 미국의 예측 불가능성에도 종속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발언은 즉흥이 아니었다. 마크롱은 도쿄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를 만난 뒤 서울로 넘어와 이재명 대통령과 회담했다. 그가 두 나라에서 던진 메시지는 같았다. 미중 사이에 낀 중견국들이 힘을 합쳐 ‘독립국 연합’을 만들자는 것이다. 군사동맹이 아니라 방산과 자원, 무역으로 엮이는 연합이다.

이 구상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지난 6개월 사이 EU는 인도네시아·인도·베트남과 잇달아 협정을 맺으며 이 구상을 현실로 옮겼다. 그리고 이 흐름은 한국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 역시 이미 이 네트워크의 한 축으로 거론되고 있어서다.

왜 안보동맹이 아니라 니켈인가

EU가 이런 길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EU는 코발트 수요의 86%, 희토류 자석 수요의 98%를 중국에 의존한다. 열에 아홉 이상을 한 나라에 기대는 구조다. 전기차·풍력발전 같은 미래 산업의 목줄을 중국이 쥐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또 다른 약점이 있다. EU는 인도태평양에서 고강도 분쟁이 터졌을 때 나서서 지켜줄 원정 군사력이 부족하다. 프랑스가 해외 영토 덕에 이 지역에 약 8천 명의 상시 병력을 두고 있는 정도가 예외적인 사례로 꼽힐 뿐이다. 안보를 약속할 힘은 없지만, 자원과 시장은 있다.

그래서 EU가 택한 접착제는 안보 공약이 아니라 무역과 투자다. 프랑스 국책연구소 IFRI는 이를 ‘마크롱 독트린’이라 부른다. 중국을 견제하는 기존 기조는 유지하되, 아시아 파트너와의 자율성 연대로 그 반경을 넓히는 흐름이라는 설명이다. 군대를 보낼 수 없다면, 대신 시장을 열고 원자재 공급망을 함께 짜면 된다는 계산이다.

6개월 사이 세 나라, 하나의 패턴

이 계산은 이미 세 건의 협정으로 구체화됐다. 시작은 2025년 9월 23일, EU와 인도네시아의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두 나라 사이 관세·투자 장벽을 낮추는 포괄적 무역협정) 타결이었다.

여기 딸린 투자보호협정(IPA)은 EU 무역협정 사상 처음으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 기업이 상대국 정부를 국제중재에 제소할 수 있는 절차) 조항을 빼고 만들어졌다. 대신 니켈·코발트 무역장벽을 없애고 이중가격제를 금지하는 조항이 들어갔다. 인도네시아가 니켈 원광 수출을 막아 자국 제련산업을 키워온 정책과, EU가 안정적 원자재 공급을 원하는 이해가 이 지점에서 맞물렸다.

넉 달 뒤인 2026년 1월 27일, 이번엔 인도 차례였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 카야 칼라스와 인도 외교장관 자이샨카르가 안보방위파트너십에 서명했다. 같은 날 자유무역협정도 함께 체결돼 EU 쪽 관세는 7년에 걸쳐 인도 수출품의 93%까지 단계적으로 철폐된다. 이틀 뒤인 1월 29일에는 베트남이 EU와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관계’로 격상했다. 아세안 국가로는 처음으로 이 최고 등급에 올랐다.

석 달 만에 세 개 대륙급 협정이 이어졌다. 우연이라 보기엔 패턴이 너무 뚜렷하다.

일본 다카이치 총리는 “뜻을 같이하는 국가와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화답했고 이재명 대통령도 방산·기술·핵심광물 분야에서 EU와의 협력 확대를 반겼다. 심지어 캐나다 마크 카니 총리까지 2026년 1월 다보스에서 힘을 보탰다. 그는 “중견국들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메뉴에 오르게 된다"고 경고했다.

강대국이 중견국의 언어를 빌려 쓰는 역설

이 대목에서 하나의 역설이 드러난다. EU는 세계 3대 경제권에 드는 강대국 연합이다. 그런데도 스스로를 ‘중견국’의 처지에 놓고 다른 중견국들에게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유럽대외관계협의회(ECFR)는 이 지점을 정확히 짚는다. 1955년 반둥회의와 비동맹운동은 신생 독립국들이 미소 양강 사이에서 살아남으려 만든 연대였다. 하지만 오늘의 EU는 그때의 신생국들과 처지가 다르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이 있어도 원정 군사력만은 없어서 중견국의 전략을 빌려 쓴다.

강대국이 중견국의 옷을 입는 이 장면은, 냉전기 약소국의 생존 전략이었던 헤징(hedging, 한쪽에 올인하지 않고 위험을 분산하는 전략)이 이제는 강대국의 도구로도 쓰인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카니 총리가 말한 ‘테이블과 메뉴’의 비유를 빌리면, 예전엔 메뉴에 오를 걱정을 하던 쪽이 오늘은 테이블 자리를 놓고 판을 짜는 쪽으로 자리를 옮긴 셈이다.

물론 이 네트워크에 균열이 없는 건 아니다. 아세안·인도·일본·한국·호주는 대만 문제와 남중국해 영해 분쟁에서 저마다 셈법이 다르다. 니켈과 관세로 엮인 협정이 안보 위기 앞에서도 결속력을 유지할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이 네트워크는 아세안까지 번질까

지금까지는 인도네시아·인도·베트남 세 나라가 핵심 축이다. 다음 단계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곳은 필리핀·말레이시아 같은 아세안 다른 회원국과, 이미 안보 파트너십을 맺은 한국·일본이다. 이 확산이 성공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첫째, 니켈처럼 양쪽 이해가 겹치는 원자재 품목이 계속 나와야 한다. 둘째, 미중 어느 한쪽의 압박이 지나치게 강해져 중견국들이 어쩔 수 없이 줄을 서야 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가장 큰 변수는 역시 미국의 태도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에 노골적인 양자택일을 강요한다면, 이 헤징 네트워크는 오히려 명분을 얻어 더 빨리 커질 수 있다. 반대로 미중 관계가 일시적으로 완화된다면, 굳이 새로운 틀을 만들 필요성은 줄어든다.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는 협정의 숫자가 아니라 참여국들이 실제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한목소리를 내느냐다.

️ 정책 및 사회적 시사점

각국 정부에게 이 흐름은 새로운 선택지를 던진다. 기존의 미국 중심 동맹이나 중국 중심 경제권 편입이라는 양자택일 대신, 무역·투자 협정을 매개로 한 느슨한 다자 네트워크가 세 번째 경로로 떠올랐다. 다만 이 경로는 안보 위기 시 구속력이 약하다는 한계가 있어, 정책 담당자는 ‘어디까지 이 네트워크에 기댈 수 있는가’를 냉정히 가늠해야 한다.

조기 경보 지표로는 아세안 개별국의 EU 협정 체결 여부, 그리고 대만해협 긴장 고조 시 이 네트워크 참여국들의 공동성명 발표 여부를 지켜볼 만하다. 공동성명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 네트워크는 경제협력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비즈니스 및 투자 시사점

니켈·코발트 관련 기업에는 공급망 재편이 곧 사업 기회다. 인도네시아 니켈 처리 기업은 EU 시장 접근이 쉬워지는 대신, 탄소 배출과 환경 기준을 지켜야 하는 부담도 함께 진다. 밸류체인 상류(원광 채굴)에서 하류(배터리·전기차)로 갈수록 이번 협정의 수혜 폭이 커질 가능성이 있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EU-인도·EU-베트남 협정이 만드는 관세 격차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경쟁국이 EU 시장에서 관세 우위를 먼저 확보하면, 같은 품목을 수출하는 한국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밀릴 수 있어서다.

지난 6개월을 되짚어 보면 하나의 그림이 보인다. 안보를 약속할 힘이 부족한 EU가 니켈과 관세와 전략적 지위라는 카드로 아시아 중견국들을 하나씩 엮고 있다. 이 카드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실질적이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는 이미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셈법에 들어와 있다.

이 흐름은 냉전기 비동맹운동의 재판이 아니다. 그때는 약소국들이 살아남으려 뭉쳤다면, 지금은 강대국 EU가 스스로 중견국의 언어를 빌려 쓰고 있다는 점에서 방향이 거꾸로다. 그만큼 오늘의 국제질서에서 ‘중견국’이라는 자리 자체가 재평가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카니 총리의 말대로 테이블에 앉을지 메뉴에 오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테이블의 좌석표는 이미 니켈과 협정문으로 조금씩 그려지고 있다.

아무도 확답할 수 없는 질문들, 당신이라면 어떤 답을 고르겠는가

만약 당신이 정부 부처에서 통상 전략을 짜는 담당자라면, 안보 약속 없는 무역 네트워크에 얼마나 무게를 실을 수 있을까? 눈앞의 관세 혜택과, 위기 상황에서 드러날 수도 있는 결속력 부족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을지 생각해볼 만하다.

한국이 이미 이 네트워크의 한 축으로 거론된다는 사실을, 평범한 소비자나 직장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당신이 니켈이나 배터리 관련 산업에서 일하고 있다면, 회사의 수출 경쟁력이 이런 국제 협정 하나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실감할 것이다.

안보동맹 대신 자원·무역으로 엮이는 이런 연대가,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실제 위기 앞에서 힘을 발휘할 거라 믿는가, 아니면 평화로울 때만 통하는 느슨한 약속이라 생각하는가?

주목해야 할 것들

미래 신호: EU가 아세안 다른 회원국(필리핀·말레이시아 등)과 유사한 협정을 추가로 맺는지가 이 네트워크의 확산 여부를 가늠하는 다음 신호다.

⚖️ 분기점: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국에 대한 양자택일 압박을 강화하느냐, 미중 관계가 완화되느냐에 따라 이 네트워크의 확산 속도가 갈릴 것이다.

전략 창: 니켈처럼 EU와 아시아 양쪽의 이해가 겹치는 원자재 품목이 나올 때마다, 비슷한 협정을 맺을 수 있는 기회의 창이 열린다.

연결 이슈: 미국의 유럽 주둔군 감축과 ‘NATO 유럽화’ 흐름은, EU가 왜 자체적인 아시아 네트워크 구축에 나섰는지를 설명하는 배경과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