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71밀리리터가 바꾼 셈법

2026년 초, 중국 21개 임상기관에서 특발성 폐섬유증(IPF) 환자 71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 2상이 끝났다. 인실리코 메디슨이 AI로 설계한 신약 후보물질을 12주 투여한 환자군의 폐 기능(FVC)은 98.4밀리리터 늘었고 위약군은 62.3밀리리터 줄었다.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였다.

이 신약을 발견하고 전임상까지 끌고 오는 데 든 비용은 약 600만 달러, 기간은 18개월. 전통적인 방식이라면 1억2억 달러에 610년이 걸렸을 자리다.

숫자 하나가 산업 전체의 셈법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결과는 “AI가 신약을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처음으로 임상 데이터로 뒷받침된 사례라는 점에서 다르다. 미국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은 2026년 6월 낸 보고서에서, AI 지원 신약 후보 15개 중 5개가 4년 안에 임상 단계에 진입했다고 밝혔다. 역사적 평균은 5~6년이었다.

발견 단계의 장벽이 낮아지자, 그 장벽을 장악해온 빅파마의 독점 구조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균열이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에 어떤 틈을 열어주는지는 뒤에서 짚는다 — 한국은 임상 역량은 갖췄으나 신약을 처음 찾아내는 발견 단계에서는 오랫동안 약했다.

밸류체인 지도 — 이익은 어디로 이동하는가

AI 신약발견의 밸류체인(원료·기술이 최종 제품으로 완성되기까지 이어지는 단계별 사슬)은 세 단계로 나뉜다. 발견 단계(상류)에서 후보물질을 찾고, 중개연구 단계(중류)에서 실험실 검증과 임상 설계를 거쳐, 상업화 단계(하류)에서 빅파마가 제조·규제·시판을 맡는다.

단계무엇을 하는가마진 구조진입장벽
상류 (발견·파운데이션모델)타겟 발굴, 단백질 구조예측, 생성형 분자설계소프트웨어 라이선스+장기 로열티 — 잠재력은 크나 아직 검증 이전AI 인재·컴퓨팅 자원·독점 데이터
중류 (중개연구·검증·임상설계)in silico 예측을 실험실에서 검증하고 임상시험을 설계협업계약금+마일스톤 — 변동성이 크다로봇 실험 인프라+임상 노하우
하류 (상업화·빅파마 채택)AI로 찾은 후보물질을 사들여 제조·규제·시판까지 완성전통 제약 마진 — 높고 안정적자본력·영업망·규제 경험

가치는 원래 하류에 가장 두텁게 고여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2026년 3월 일라이 릴리는 인실리코 메디슨과 27억 5,000만 달러 규모의 협업 계약을 맺었다. 같은 시기 릴리는 컴퓨테이셔널 화학 기업 슈뢰딩거의 자회사 에이잭스를 인수하며 약 5,700만 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했다. 발견 단계 기술을 하류의 빅파마가 직접 사들이는 방식으로, 가치가 상류·중류 쪽으로 다시 흘러가는 모양새다.

시장 규모와 성장 동인

AI 신약발견 시장 규모는 조사기관마다 편차가 크다. 2026년 기준 시장 규모(TAM, 전체 시장 규모)는 29억 달러에서 86억 달러까지, 연평균 성장률(CAGR)은 12.6%에서 30.5%까지 갈린다. 시장 범위를 소프트웨어만으로 좁히는지, AI 기반 서비스 전체로 넓히는지에 따라 정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방향은 일치한다 — 2035년까지 250억~440억 달러 규모로 커진다는 전망이 다수다.

성장을 미는 힘은 뚜렷하다. ITIF는 발견·전임상 단계 비용과 시간이 2550%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고 일부 기업은 신약 하나당 3억4억 달러가 절감된다고 추정한다.

반면 저해 요인도 분명하다. 국내 상장 AI 신약사조차 아직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고 2025년 한 해에만 소형 AI 신약발견 기업 여럿이 자본난으로 문을 닫거나 인력을 20% 넘게 줄였다. 규제 변수도 커지는 중이다. 유럽연합(EU) AI법의 고위험 조항이 2026년 8월 발효를 앞뒀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AI 가이드라인도 2026년 안에 확정될 전망이다.

산업 생애주기로 보면 이 밸류체인은 도입기에서 성장기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인실리코의 임상 2상 성공은 업계 최초의 ‘증거점(proof point)‘으로, 성장기 진입의 신호탄으로 읽힌다.

포터의 다섯 가지 힘(Five Forces, 산업의 경쟁 구도와 수익성을 파악하는 다섯 가지 분석축)으로 이 산업의 수익성 구조를 짚어보면 방향이 엇갈린다. 신규 진입 위협은 높다 — 파운데이션모델 접근성이 높아지며 앤스로픽이 2026년 4월 스타트업 코이피션트 바이오를 4억 달러에 인수하는 등 빅테크가 직접 뛰어들고 있다. 대체재 위협은 중간이다 — 전통 위탁연구기관(CRO)이 여전히 대안이지만 속도에서 밀린다. 경쟁 강도는 높다 — 자이라·아이소모픽랩스·인시트로·리커전·인실리코 등 다수 플레이어에 자본이 몰려 있다.

공급자 교섭력은 중간이다 — 클라우드·GPU 컴퓨팅과 임상 데이터 보유자가 협상력을 쥔다. 구매자 교섭력은 높다 — 소수의 대형 빅파마가 계약 조건을 주도한다. 다섯 축 중 셋이 신규 진입자와 기존 강자 모두에게 유리하게 열려 있다는 것은, 이 산업이 아직 승자가 굳어지지 않은 유동적인 국면임을 뜻한다.

돈은 어디로 — 개별 종목이 보여주는 자본의 방향

이 산업을 전담하는 지수나 상장지수펀드(ETF)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개별 종목의 최근 주가 흐름이 자본의 방향을 짐작하게 한다.

항체 설계 기업 앱사이(Absci)는 임상 1상 데이터 발표 이후 2026-07-07 기준 12개월 사이 주가가 200% 넘게 뛰었다. 반면 종단형(end-to-end) 플랫폼을 표방해온 리커전 파마슈티컬스는 2026-07-08~12 기준 52주 고점(7.18달러) 대비 절반 아래(3.56달러)로 떨어졌다. 두 회사 모두 AI 신약발견 상류·중류에 속하지만 시장은 ‘실제 임상 데이터를 내놓았는가’를 기준으로 극단적으로 다른 평가를 매기고 있다. 이 시세는 조회 시점 기준이며 이후 변동될 수 있다.

한·미 산업 포지셔닝 — 발견의 빈틈을 메우려는 시도

미국은 상류와 하류 양쪽에서 이 흐름을 주도한다. 자이라·아이소모픽랩스처럼 10억 달러 넘는 사모 자금을 등에 업은 상류 스타트업이 즐비하고, 하류의 릴리·노바티스·사노피는 인수합병으로 발견 기술을 직접 사들인다.

한국의 자리는 다르다.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은 오랫동안 임상 수행 역량은 탄탄했지만 신약을 처음 찾아내는 발견 단계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AI 신약발견은 이 구조적 빈틈을 메울 잠재적 통로다.

코스닥에는 신테카바이오·파로스아이바이오·온코크로스 같은 1세대 AI 신약발견 기업이 상장돼 있다. 다만 아직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고 두 회사는 상장 시점 대비 시가총액이 절반 넘게 줄었다. 신테카바이오가 발굴해 HK이노엔에 넘겼던 후보물질은 물성 문제로 연구가 중단됐고, 파로스아이바이오가 유한양행에 넘겼던 후보물질도 임상개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발견 단계의 기술력과 그 기술을 실제 임상까지 끌고 갈 자본력·실행력 사이의 간극이 한국 기업들의 공통된 과제로 남아 있다.

결론 — 다음 질문은 기업으로 넘어간다

이번 시그널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밸류체인 구간은 두 곳이다. 첫째는 실제 임상 데이터로 검증받기 시작한 중류의 중개연구·검증 플레이어들이다. 둘째는 그 검증된 기술을 사들이는 하류의 빅파마다. 상류의 발견 플랫폼은 여전히 잠재력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이 두 구간에서는 이미 실제 계약과 실제 임상 데이터가 쌓이고 있다.

발견 단계의 비용과 시간이 무너진 자리에서, 진짜 승부는 이제 임상 2상·3상의 문턱을 넘는 기업이 누구인가로 옮겨간다. 그 답에 가장 가까이 있는 기업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그 답은 기업편에서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