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오랫동안 당연한 방향으로 여겨졌다. 냉전이 끝난 뒤 선거로 뽑힌 정부는 계속 늘었고, 권위주의는 낡은 체제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이 흐름이 거꾸로 가고 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선거는 열리지만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나라가 늘고,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는 하나씩 힘을 잃는다. 이것이 일시적인 흔들림인지, 아니면 방향 자체가 바뀌는 신호인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여러 국제기구가 내놓은 수치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브이뎀(V-Dem)은 2025년 말 기준으로 세계에 전제정(autocracy), 곧 권력 견제와 시민 자유가 약한 체제가 92개, 민주정이 87개 있다고 집계했다. 세계 인구의 74%가 전제정 아래 살고 있다는 뜻이다. 프리덤하우스는 세계의 자유가 2025년까지 20년 연속 후퇴했다고 밝혔다. ‘자유로운’ 나라에 사는 인구는 21% 남짓에 불과하다. 국제민주선거지원기구(International IDEA)의 분석도 다르지 않다. 2020~2024년 선거 가운데 약 20%는 패자가 결과를 부정했고, 또 다른 20%는 선거를 둘러싼 법정 다툼으로 이어졌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conomist Intelligence Unit, EIU)의 세계 민주주의 지수(World Democracy Index)는 2014년 5.5 점 중반대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하다가 2024년 5.17에0서 2025년 5.19로 소폭 반등했다. 이 지수는 10점 만점이며 점수가 높을수록 민주주의에 가깝다는 뜻이다. 다만 지수마다 민주주의를 가르는 문턱과 가중치가 다르다. 따라서 숫자는 확정된 판결이 아니라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로 읽어야 한다.

왜 나타났는가?: ‘유능한 통치’의 유혹

이제 유권자는 유세장보다 화면에서 정치를 먼저 만난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그럴듯한 가짜 영상과 음성을 싸게 만든다. 또한 마이크로타게팅(microtargeting), 곧 사람마다 다른 메시지를 보내는 정밀 표적 광고를 쉽게 만든다. 국제민주선거지원기구는 이런 도구가 사실을 흐리고 딥페이크를 퍼뜨리며, 매우 잘게 나눈 유권자 집단을 겨냥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유튜브와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은 무엇을 더 오래 보여줄지 스스로 정한다. 이들은 선출되지 않은 매체이지만, 공론장의 문지기처럼 움직인다. 기존 법과 제도는 공중파 방송사와 정당을 주로 겨냥해 만들어졌다. 국경을 넘나드는 알고리즘과 데이터 기업이 만드는 규칙에는 제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불평등과 반복되는 위기는 이 틈을 더 넓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26년 조사에서 중앙정부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40%에 그쳤고,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43%로 더 많았다. 노동계층을 대표하는 의원은 줄고, 고학력층과 고소득층이 서로 다른 진영의 중심을 차지한다. 보통선거가 있어도 정치가 ‘그들끼리의 경기’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감염병과 전쟁, 치안 불안은 신속한 결정을 요구한다. 그러나 임시로 부여한 권한이 오래 남으면 행정부의 힘만 커진다. 여기에 능력주의와 전문가 통치, 곧 유능한 소수가 더 많이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힘을 보탠다. 토론을 건너뛰는 일을 ‘유능한 관리’로 포장하면, 시민은 결정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의 대상에 가까워진다.

정보과부하 역시 영향을 미쳤다. 정보기술과 인터넷, 모바일, 생성형 인공지능은 정보와 지식의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문제는 그 양이 인간의 인지 능력을 넘어섰다는 데 있다. 정보 접근의 격차에서는 벗어났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정보의 과잉 속에서 표류하게 됐다. 낯선 정보를 하나하나 따져보기보다 이미 믿고 있던 생각에 기대는 편이 더 쉬운 선택이 된 것이다. 비판적 사고와 이성으로 정보를 걸러내기보다, 확신을 뒷받침해 주는 정보에 몸을 맡기는 경향이 커졌다. 그 결과 정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건강한 토론 대신 극단적 갈등과 대립이 자리를 잡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기술 발달에 의한 정보과부하와 지식과부하로 전통적인 민주주의가 체제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가 지나친 개인주의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낭만적 기대도 사라진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미국의 탈자유주의 사조는 플라톤의 철인정치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팔란티어의 피터 틸(Peter Thiel) 회장은 기술 엘리트주의와 반민주주의적 세계관을 주저 없이 보이고 있다. 일런 머스크도 그 선봉에 서 있는 것으로 읽힌다. 테크로 엘리트를 철인으로 바뀌 끼우면, 이들의 생각은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된다. 철인정치의 위험성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절망적으로 보여 주었다.

확산될 경우의 변화: 투표보다 설명받을 권리가 흔들린다

이 흐름이 커지면 민주주의는 선거일보다 선거 사이의 일상에서 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시민은 투표할 권리뿐 아니라, 왜 이 광고와 정보가 자신에게 왔는지, 행정 결정에 어떻게 이의를 제기할지를 따지게 된다. 기업은 정치적 불안을 평판 문제가 아니라 사업 위험으로 다루기 시작하고, 정치광고 기록 보관과 알고리즘 감사, 선거 보안에 비용을 들이게 될 수 있다. 학교와 직장에는 합성영상 표시와 정보 검증 규칙이 늘어난다. ‘선거 보안’, ‘트러스트 앤드 세이프티(Trust and Safety)’, ‘알고리즘 감사’ 같은 업무도 커질 수 있다. 데이터와 법률 인력을 갖춘 대형 플랫폼과 중앙조직은 유리해지는 반면, 지역 언론과 작은 시민단체, 디지털에 서툰 사람은 목소리를 내는 비용이 더 커질 수 있다. 다만 이는 현재 자료를 바탕으로 한 전망일 뿐, 어느 방향으로 굳어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미래 시나리오

긍정 시나리오: 오류를 고칠 수 있는 민주주의

투표소에 가기 전, 유권자는 정치광고에 누가 돈을 댔는지, 인공지능이 쓰였는지를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거관리기구는 개표 과정을 공개하고, 법원은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 지나기 전에 결과 분쟁을 처리한다. 행정기관과 플랫폼은 결정의 이유를 설명하고, 시민에게는 삭제와 정정, 이의제기의 통로가 열려 있다. 시민의회와 지역 공론장은 전문가의 지식을 참고하되, 결론까지 맡기지는 않는다.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잘못을 찾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조금씩 돌아온다.

부정 시나리오: 문은 열려 있지만 열쇠는 다른 곳에

선거는 예정대로 열린다. 그러나 비상권한은 거듭 연장되고, 플랫폼의 추천 기준과 정치광고 자금의 흐름은 드러나지 않는다. 야당과 작은 언론은 소송과 접속 제한, 치솟는 광고비를 견디느라 경쟁할 힘을 잃는다. 시민은 결과를 믿지 못해 투표장에서 멀어진다. 한쪽은 강한 지도자를, 다른 쪽은 소수 전문가의 통치를 해답으로 찾는다. 민주주의라는 문은 남아 있지만, 그 문을 여는 열쇠는 이미 시민의 손을 떠나 있다.

갈림길: 기술보다 규칙을 보라

갈림길을 만드는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누가 데이터를 갖고 규칙을 정하는지, 실패의 비용을 누가 떠안는지, 당사자가 이유를 듣고 다툴 수 있는지가 방향을 가른다. 정치광고 공개 기록, 외부 연구자의 데이터 접근권, 비상조치를 정해진 때 자동으로 끝내는 일몰조항, 선거관리기구의 독립성, 빠른 법원 심사가 실제 시험대다. 이런 장치가 이름만 있고 작동하지 않는다면, 긍정 시나리오는 쉽게 껍데기만 남는다.

이머징 이슈 관찰 포인트: 다음 뉴스에서 볼 작은 문구들

가장 먼저 볼 것은 법안이다. 선거관리기구의 독립성, 정치광고의 투명성, 비상권한의 종료 시점을 다루는 법안은 권한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보여준다. 법원이 선거 분쟁을 얼마나 빨리 판단하는지도 지켜봐야 한다. 판결이 늦어지면 법적으로는 옳아도 정치적으로는 이미 늦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앱 화면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생성물’, ‘왜 이 광고를 보는가’, ‘이의 제기’ 같은 작은 문구는 현장의 규칙이 바뀌었다는 신호다.

기업의 채용 공고도 신호다. 선거 보안, 트러스트 앤드 세이프티(Trust and Safety), 알고리즘 감사 인력이 늘어난다면, 비용과 책임이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언론이 단순한 ‘가짜뉴스’보다 선거 무결성, 곧 선거 과정과 정보의 신뢰성, 플랫폼의 책임, 비상권한 통제를 더 자주 말하는지도 살펴볼 만하다. 반대 운동과 시민 감시단이 등장한다면, 이해관계가 실제로 건드려졌다는 뜻일 수 있다. 다만 전쟁이나 경기 침체가 만든 일시적 불신, 지수의 측정 방식 차이, 조사 범위의 확대라는 다른 설명이 남아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한 번의 선거보다, 여러 신호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봐야 한다.

마무리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안녕할까? 공동체 정신을 상실한 민주주의는 지속 불가능하다.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 조셉 테인터의 <복잡사회의 붕괴>, 에이미 추아는 <제국의 미래>, 피터 터친의 <역사 동학>,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에서 사회나 국가의 쇠퇴 원인 중 하나로 공동체 정신의 약화를 들었다. 한국사회의 경제적 격차 심화, 정치적 양극화 및 정서적 양극화는 공동체 정신의 약화와 강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공동체 정신이 없는 민주주의는 지속 불가능하며 국가와 사회도 유지하기 어렵다.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안녕할까? 그리고 우리가 지킬 수 있을까?

관련 문헌

Nord, M., Altman, D., Fernandes, T., Good God, A., & Lindberg, S. I. (2026). Democracy report 2026: Unraveling the democratic era? V-Dem Institute, University of Gothenburg. https://v-dem.net/documents/75/V-Dem_Institute_Democracy_Report_2026_lowres.pdf (V-Dem)

Freedom House. (2026). Freedom in the World 2026: The growing shadow of autocracy. https://freedomhouse.org/report/freedom-world/2026/growing-shadow-autocracy (Freedom House)

Economist Intelligence Unit. (2026). Democracy Index 2025: Democracy stabilises after eight years of decline. https://www.economistgroup.com/press-centre/economist-enterprise/eiu-democracy-index-2025-democracy-stabilises-after-eight-years-of-decline (The Economist Group)

International IDEA. (2024). The Global State of Democracy 2024: Strengthening the legitimacy of elections in a time of radical uncertainty. https://www.idea.int/gsod/2024/chapters/executive-summary/ (International IDEA)

International IDEA. (2024). Protecting democratic elections through safeguarding information integrity. Forum on Information & Democracy and Democracy Reporting International. https://doi.org/10.31752/idea.2024.1 (International IDEA)

OECD. (2026). OECD Survey on Drivers of Trust in Public Institutions 2026 Results: Navigating rising expectations and new horizons. OECD Publishing. https://doi.org/10.1787/9eb63fec-en (OECD)

Chancel, L., Gómez-Carrera, R., Moshrif, R., & Piketty, T. (Eds.). (2025). World inequality report 2026. World Inequality Lab. https://wir2026.wid.world/ (WID - World Inequality Database)

Markovits, D. (2025). How meritocracy became self-defeating. The Annals of the American Academy of Political and Social Science, 717(1). https://doi.org/10.1177/00027162261450256 (D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