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회의 쇠퇴, 제국의 쇠퇴’라는 주제를 관심과 열정을 지니신 교수님, 박사님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미국 중심의 단극 질서(하나의 초강대국이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상태)가 여러 강대국이 힘을 나누어 갖는 다극 질서로 옮겨 가고, 지구의 생물종이 급속히 사라지는 6차 대멸종이 진행 중이며, 한국 사회가 공동체 정신을 빠르게 잃어 가는 상황이 ‘쇠퇴와 붕괴’에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한국 사회와 인류 사회의 미래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께, 그간 공부하고 고민한 것을 나눕니다.
테인터와 루만을 잇는 고리
조지프 테인터(Joseph Tainter)는 미국의 인류학자입니다. 『복잡한 사회의 붕괴(The Collapse of Complex Societies)』에서 그는 사회가 문제를 풀기 위해 점점 복잡해지고, 그 복잡성을 관리하는 도구와 제도에 수확체감의 법칙 — 투입을 늘려도 돌아오는 성과는 갈수록 줄어드는 현상 — 이 작동하면서 결국 사회가 붕괴한다고 주장합니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독일의 사회학자입니다. 『사회체계들(Soziale Systeme, 영역본 Social Systems)』에서 일반시스템이론과 정보이론 등을 엮어, 사회는 환경의 복잡성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 복잡성의 원칙’에 따라 스스로를 구성한다고 말합니다. 바깥 세상이 복잡할수록 그것을 감당할 만큼의 복잡성을 사회 안쪽에도 갖추게 된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이 쓰는 ‘복잡성’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본질에서 큰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테인터의 사회적 복잡성은 훗날 복잡계(수많은 구성 요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전체가 부분의 합과 다르게 움직이는 시스템)의 복잡성으로 이어지고, 루만의 복잡성은 처음부터 복잡계의 복잡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회의 흥망성쇠를 두고 두 사람이 대는 논거와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그 맥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사회의 흥망성쇠와 패나키, 그리고 미래학
테인터의 주장과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C. S. 홀링(C. S. Holling)이 내놓은 패나키(Panarchy)입니다. 홀링은 캐나다의 생태학자로, 회복탄력성(resilience, 충격을 받은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고 되돌아오거나 새 균형을 찾는 힘), 적응적 순환(adaptive cycle, 성장 → 축적 → 붕괴 → 재조직을 되풀이하는 주기), 패나키(크고 작은 여러 규모의 적응적 순환이 서로 얽혀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 개념을 창안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사회의 흥망성쇠를 복잡한 생태계의 눈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큰 함의를 가집니다.
홀링의 주요 사상은 1973년 논문 「생태계의 회복탄력성과 안정성(Resilience and Stability of Ecological Systems)」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predict future, future generation 같은 표현을 씁니다. 2002년 랜스 거너슨(Lance Gunderson)과 함께 펴낸 『패나키(Panarchy)』에서는 foresight라는 단어를 씁니다. 미래학에 대한 이해와 깊이가 있었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미래학에서는 predict 대신 foresight를 씁니다. 20세기 말부터 ‘미래의 여러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해 왔습니다.
foresight는 흔히 predict와 마찬가지로 ‘예측’으로 번역됩니다만, 그렇게 옮기면 뜻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습니다. predict는 예측 혹은 단정예측으로, foresight는 열린예측으로 옮기는 편이 낫습니다. 하나의 미래를 맞히려는 태도와, 여러 갈래의 미래를 미리 살펴 두려는 태도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반시스템이론, 복잡계 그리고 미래학
루만과 홀링은 모두 일반시스템이론과 복잡계에 대한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생물학자 루트비히 폰 베르탈란피(Ludwig von Bertalanffy)의 일반시스템이론은 부분을 쪼개 보는 대신 전체를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 주요 대상에는 복잡계가 포함됩니다.
복잡계에 들어서야 비로소 인간 사회는 과학적으로 비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원인을 알면 결과가 정해진다는 식의 설명이 통하지 않고, 미래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미래학의 과학철학적 기반이 일반시스템이론과 복잡계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붕괴학과 미래학
사회의 쇠퇴를 이야기하다 복잡계까지 이어지니, 글이 소요(逍遙)하듯 정처 없이 흘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과 생각이 흩어졌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다시 발산한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마무리 삼아 말씀드리면, 붕괴학(Collapsology)을 초점에 놓고 공부하거나 책을 내시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인류 사회가 반드시 붕괴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과거 인류 사회가 무너진 역사와 사회 변화의 패턴을 이해하려는 시도에 해당합니다. 미래학이 미래에 대한 경고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점도 함께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붕괴학은 궁극적으로 ‘디스토피아 너머(Beyond Dystopia)‘와 이어지는 희망의 원리로 보입니다.
누구는 우주 데이터 센터를 주장합니다. 누구는 노화를 질병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면에 똬리를 튼 전제와 가정은 지속 성장입니다.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굴러간다는 ‘Business As Usual’의 미래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술이 사회적 복잡성을 줄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술이 새로운 사회적 복잡성을 늘린다는 점은 애써 외면합니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서적 양극화는 사회적 복잡성을 키웁니다. 기술낙관주의는 사회적 상상력의 해체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참고로 우주 데이터 센터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저전력 AI 반도체가 개발된다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요, 그렇게 되면 굳이 우주에 데이터 센터를 지을 필요 자체가 줄어듭니다. 지금의 반도체 기술로 5기가와트(GW) 규모의 우주 데이터 센터를 지으려면, 열을 식히는 방열판의 한 변이 1~2킬로미터는 되어야 합니다. 우주 물류 비용이 어마어마해진다는 뜻입니다.
영생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인간의 욕망에 친화적인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나 싶습니다. 인간의 노화와 치매는 복잡계의 특징을 보입니다. 치매조차 아직 치료제가 나오지 않았는데, 노화를 치료한다는 것은 아주 먼 미래에나 실현될 과학기술일 겁니다.
과학기술의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미치오 카쿠(Michio Kaku)의 『불가능은 없다(Physics of the Impossible)』를 참고해야 합니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인 그는 순간이동이나 투명인간처럼 공상과학에 나오는 기술들을 물리 법칙에 비추어 ‘언제쯤 가능할 것인가’로 나누어 봅니다. 언젠가는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카쿠의 글에서 지적 겸손함의 필요성을 발견했고, 그 이후 물리적 불가능이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다른 미래를 꿈꾸는 미래학, 사회적 상상력을 강화하는 미래문해력(futures literacy, 미래를 여러 갈래로 상상하고 그 상상을 오늘의 판단에 활용하는 능력)이 한국 사회의 골목길을 채웠으면 합니다. 그런 바람으로 토막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