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유엔 기후변화 사무총장이 에너지 전환을 국가안보 전략의 핵심이라고 못 박았다.
온실가스 감축량이 아니라 화석연료 수입 청구서가 설득의 근거로 올라섰다.
에너지의 94%를 사 오는 한국은 이 논리의 최대 수혜자이자 최대 시험대다.
같은 해, 같은 단어가 정반대를 가리켰다
2026년 3월 11일,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들이 비축해 둔 석유 4억 배럴을 시장에 풀기로 합의했다. 기구가 생긴 지 50여 년 만의 최대 규모였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브렌트유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선 직후였다.
넉 달 뒤인 7월 24일, 뉴욕 유엔총회 회의장에서 사이먼 스틸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이 같은 사태를 꺼내 들었다. 다만 결론이 정반대였다. “더 빠른 에너지 전환은 정부의 본업이며, 국가안보 전략의 핵심이다.”
석유를 지키려고 만든 기구의 사상 최대 조치가, 석유를 버려야 안전하다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로 되돌아온 셈이다. ‘안보’라는 한 단어를 두 진영이 반대 방향으로 당기고 있다. 그리고 3월의 그 방출 명단에는 한국도 올라 있었다.

스틸의 연설에는 온실가스 숫자가 없었다
그날 스틸이 내민 근거는 배출량 표가 아니었다. 청구서였다. 동남아시아가 올해 에너지를 사 오는 데 1,600억 달러를 쓸 전망이라는 숫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동카리브 국가들은 2021년 기준 해마다 4억 4,000만 달러 넘게 기름값으로 냈다.
그 4억 4,000만 달러는 이 나라들 전체 수입의 15%다. 무역수지로 보면 17%가 기름값으로 빠져나간다. 감축 부담을 나눠 지자는 요구와는 결이 다르다. 수입 의존이 당신 나라의 살림을 갉아먹고 있다는, 철저히 자국 이익에 기댄 논법이다.
재원 요구도 같은 문법을 따랐다. 스틸은 선진국을 향해 적응 재원을 세 배로 늘리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했다. 2035년까지 해마다 3,000억 달러를 내놓고, 이를 연 1조 3,000억 달러로 키우는 경로의 첫 단계로 삼으라는 주문이었다. 다자개발은행에는 낮은 금리의 자금과 보증, 정책 기반 대출을 늘려 달라고 요청했다.
기후 회의론이 강한 정부를 설득하려면 윤리로는 안 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그런데 이 문법을 먼저 쓴 쪽은 유엔이 아니었다.
국제에너지기구도 같은 단어를 쓴다, 다른 뜻으로
다섯 달 앞선 2월 18일과 19일, 파리에서 국제에너지기구 각료회의가 열렸다. 역대 최다인 54개국이 참여했고 장관급만 40명이 모였다. 의장은 소피 헤르만스 네덜란드 부총리였다.
이 자리에서 나온 「에너지 혁신 현황 2026」 보고서의 결론은 선명했다. 에너지 혁신은 더 이상 배출 감축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자리를 경쟁력과 회복력, 국가안보가 차지했다.
응답자의 80%가 2025년 혁신을 이끄는 3대 동인 중 하나로 에너지 안보를 꼽았다. 가격보다도, 배출 감축보다도 앞섰다.
갈라지는 지점은 방향이다. 각료회의 의장 요약문은 전력 수요 증가와 공급망 회복력을 짚으면서 석유와 가스의 지속적 중요성을 나란히 적었다. 회원국마다 전력 시스템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는 단서도 붙었다. 같은 ‘에너지 안보’라는 말이 한쪽에서는 재생에너지를 늘리라는 주문이 되고, 다른 쪽에서는 유전과 가스전을 놓지 말라는 방패가 된다.
문제는 기후를 믿느냐가 아니다. 청구서를 누가 내느냐다.
1974년에 만든 기구가 2026년에 스스로 한계를 말했다
국제에너지기구는 1973년 석유 파동의 산물이다. 아랍 산유국들이 수출을 끊자 소비국들이 이듬해 만든 조직이 이 기구였다. 창립 약속은 하나였다. 위기가 오면 비축유를 함께 푼다.
2026년 3월, 그 약속이 역사상 가장 크게 발동됐다. 4억 배럴은 회원국들이 쌓아 둔 전체 비축량의 3분의 1이다.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때 푼 1억 8,200만 배럴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 정작 발표한 파티 비롤 사무총장의 말에는 자기 한계가 들어 있었다. “에너지 안보는 국제에너지기구의 창립 사명이며, 회원국들이 함께 결단력 있는 행동에 나선 강한 연대를 보여줬다"고 한 뒤 곧바로 덧붙였다. “안정적인 흐름을 되찾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호르무즈 해협 통항 재개다.”
4억 배럴은 세계가 나흘 쓸 양이다. 반세기 동안 쌓아 온 안전판이 봉쇄 앞에서는 나흘어치 시간에 그쳤다. 쌓아 두면 안전하다는 믿음 위에 세워진 기구가, 스스로 그 믿음의 한계를 말한 장면이다. 스틸이 7월에 파고든 틈이 바로 여기다.
한국의 청구서는 구조가 아니라 유가가 깎아줬다
한국의 에너지 수입의존도는 93.8%다. 1990년에 88.7%였으니 30여 년 동안 거의 내려오지 않았다. 석유와 가스는 사실상 전량을 사 온다.
2025년 상반기 에너지 수입액은 595억 달러로 1년 전보다 15.3% 줄었다. 좋은 소식처럼 보이지만 이유가 문제다. 구조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국제 유가가 내려서다. 값이 다시 오르면 청구서도 그대로 돌아온다.
발전 쪽에서는 진짜 변화의 조짐도 있다. 에너지 분석기관 엠버에 따르면 2025년 4월 한국의 전력 생산에서 화석연료 비중이 49.5%로 떨어졌다. 월간 기준으로 처음 절반 아래로 내려간 기록이다. 석탄은 18.5%로 역대 최저였다.
문제는 속도다. 국내 재생에너지 설비는 누적 34기가와트, 해마다 4~5기가와트씩 늘고 있다. 그런데 2035년 온실가스 감축목표의 강한 시나리오는 160기가와트를 요구한다. 지금 속도로는 계산이 맞지 않는다.
계획서 안에서도 어긋난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이 잡은 2038년 목표는 121.9기가와트다. 감축목표가 요구하는 수준과 40기가와트 넘는 간극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안보라는 문은 양쪽으로 열린다
이 논리가 어디로 갈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첫 시험대는 제3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1)다. 11월 9일부터 20일까지 튀르키예 안탈리아에서 열린다.
스틸이 진전을 요구한 항목은 두 가지, 적응 지표와 정의로운 전환 장치다. 의장국 튀르키예는 2035년까지 세계 전력화율을 35%로 끌어올리자는 목표를 행동 의제로 내놓았다.
여기서 갈린다. 안보 논리가 계통 투자와 재생에너지 확대로 이어지면 전환은 빨라진다. 반대로 공급 안정이라는 명분이 원자력 확대와 자국 화석연료 개발, 핵심 광물 확보 경쟁의 정당화 논리로 쓰이면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국제에너지기구 각료회의가 석유와 가스의 중요성을 함께 적어 둔 것은 후자의 문이 이미 열려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이 논법은 화석연료가 비쌀 때 힘을 얻는다. 유가가 낮게 유지되면 수입 청구서 논법 자체가 설득력을 잃는다.
실제로 2025년 한국의 에너지 수입이 줄어든 것도 유가 하락 덕이었다. 값이 싸면 굳이 바꿀 이유가 없다는 반론은 그때 가장 강해진다.
한 가지 더. 공공 부문의 에너지 연구개발 투자는 국내총생산의 0.05% 수준으로, 1970년대 석유 파동 직후의 절반에 그친다. 안보를 말하는 목소리는 커졌지만 돈은 아직 그만큼 따라가지 않았다.

️ 정책·사회 — 기후 예산이 안보 예산으로 옮겨갈 때
정당화 논리가 바뀌면 심의 절차와 소관 부처가 바뀐다. 전력망과 계통 투자를 환경 예산이 아니라 안보·산업 예산의 논리로 다룰 창이 열린다. 기후 의제에 소극적인 정부를 우회 설득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위험도 함께 온다. 안보라는 명분은 절차와 주민 수용성 심사를 건너뛰는 통로로도 쓰인다. 송전망 건설과 입지 갈등이 첨예한 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정책 창을 열면서 안전장치도 같이 설계해야 하는 이유다. 조기 경보 지표는 COP31에서 적응 지표 문안이 괄호를 벗는지 여부다.
비즈니스·투자 — 다자개발은행이 여는 문
스틸이 다자개발은행에 요구한 것은 낮은 금리의 자금과 보증, 그리고 사업성 있는 프로젝트 목록을 만드는 지원이었다. 이 요구가 실행되면 신흥국의 전력망과 재생에너지 사업 목록이 먼저 두꺼워진다. 한국의 전력 기자재와 설계·시공 기업에게는 접점이 생기는 구간이다.
적응 재원을 세 배로 늘리겠다는 약속이 실제 집행으로 이어지는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방재·물관리·냉방 같은 적응 인프라 시장은 아직 형성 초기다. 다만 약속과 집행 사이의 거리는 기후 재원 논의에서 늘 문제였다. 집행 실적이 나오기 전에 시장 규모를 앞질러 잡는 것은 위험하다.
청구서는 줄었지만 구조는 그대로다
석유를 지키려고 만든 기구가 사상 최대 방출을 하고도 나흘어치 시간밖에 벌지 못했다. 유엔은 그 틈을 파고들어 기후의 언어를 안보의 언어로 바꿔 달았다. 그러나 같은 단어는 원자력과 유전 개발 쪽으로도 똑같이 열려 있다. 한국은 그 방출 명단에 이름을 올린 나라이면서, 에너지의 94%를 밖에서 사 오는 나라다.
한국이 어느 쪽 ‘안보’를 택했는지는 말이 아니라 숫자로 드러난다. 지금 만들고 있는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재생에너지 설비 목표를 11차의 121.9기가와트에서 얼마나 끌어올리는지, 그 한 줄이 답이다. 40기가와트의 간극을 메울 계획이 나오는지가 진짜 지표다.
이것은 기후 논쟁의 종결이 아니라 언어의 교체다. 설득의 문법이 바뀌면 예산의 흐름이 바뀌고, 예산이 바뀌면 설비가 바뀐다. 다만 그 순서가 거꾸로 갈 수도 있다.
3월의 청구서는 유가가 내려주며 잠시 얇아졌다. 다음 청구서가 도착할 때 한국은 무엇으로 그것을 막고 있을 것인가.
생각해볼 질문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을 때 그 돈의 상당 부분이 배를 타고 들어온 기름과 가스 값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본 적 있는가? 그 값이 다시 오르면 여러분의 생활비에서 무엇이 먼저 줄어들지 생각해보자.
집 근처에 송전탑이나 태양광 설비가 들어선다고 할 때, ‘국가 안보를 위해서’라는 설명을 들으면 마음이 달라질 것 같은가? 어떤 설명이라면 납득하고 어떤 설명이면 거부할지 스스로 선을 그어보자.
에너지를 아끼자는 말이 환경 이야기일 때와 나라 살림 이야기일 때, 당신에게는 어느 쪽이 더 와닿는가? 그 차이가 왜 생기는지 따져보면 이 기사의 핵심이 보인다.
주목해야 할 것들
미래 신호 — 기후 의제가 안보 부처와 재무 부처의 언어로 번역되는 흐름은 유엔과 국제에너지기구 양쪽에서 동시에 관찰된다. 이 번역이 정착하면 기후 예산의 규모보다 소관 부처가 어디인지가 더 중요한 변수가 된다.
⚖️ 분기점 — 같은 안보 논리가 재생에너지 확대로 갈지, 원자력과 자원 확보 경쟁으로 갈지가 아직 열려 있다. 국제에너지기구 각료회의 요약문이 석유·가스의 중요성을 함께 명시한 대목이 후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전략 창 —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 기간은 한국이 이 프레임을 자국 계획에 반영할 수 있는 창이다. 계획이 확정되고 나면 다음 개정까지 방향을 되돌리기 어렵다.
연결 이슈 —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그에 따른 방산·에너지 공급망 재편은 이 이슈의 물리적 배경이다. 해협 상황이 길어질수록 안보 프레임의 설득력은 커지고, 해소되면 빠르게 식을 수 있다.